조성민 동지의 혁명적 신념과 실천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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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성민 동지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어느 날 국제사회주의자
국제사회주의자
1990년대의 우경화된 이데올로기 지형과 혁명적 경향에 대한 국가의 혹심한 탄압 때문에 1990년대 내내 IS 회원 수는 1백수십 명을 넘기 힘들었고, 고립감과 생활고 등으로 중도에 활동을 그만둔 회원들도 많았다.
신입회원 조성민 동지에게서 느꼈던 혁명적 열정은 그가 사망 며칠 전
2000년대는 내가 조성민 동지와 좀 더 각별
처음 대학에서 활동할 때 참으로 막막했던 게 생각난다. 당시 IS 출신 회원들은 공개 활동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학교에 뿌리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활동했는데, 우리는 대학에서 공개토론회를 열고 신문판매를 하면서 대학생들과 만나려고 애썼다.
조성민 동지는 회의나 모임에서 농담을 자주 했는데, ‘썰렁한’ 농담을 한 뒤에도 스스로 대견해하곤 했다. 당시 나는 그의 언어유희
이 시기 한양대에서 우리의 활동은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자신이 과거의 오랜 비합법 활동에서 비롯한 잘못된 습성
그러나 실질적 성과가 없거나 활동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면 사기가 떨어지기 쉬운 법. 조성민 동지는 2000년대 초반 몇 년 간 대학에서 활동을 하다 민주노동당 중랑구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동안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내가 2000년대 중후반 민주노동당 중랑구위원회에서 활동할 때 그가 활동에 복귀해 다시 함께 일하게 됐다. 2006~2007년에 그는 민주노동당에서 만난 노동자들과 자주 어울려 토론하고 과거보다 더 규율 있게 활동해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조 동지는 이론에 관심이 많고 핵심을 잘 포착하는 능력이 있어 유능한 교육가·선전가가 될 잠재력이 있었다. 2000년대에 그 잠재력은 그가 한동안 사기가 떨어지면서 많이 발휘되지 못했지만 2007년 이후에는 다시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 단체가 2005~2007년 활동의 문제점
이른 죽음으로 피다 만 조성민 동지의 삶은 매우 아쉽지만, 그동안 그의 기여는 결코 적지 않다. 많지 않은 과외수업료로 생활하면서 지금껏 사회 변혁 운동과 조직 건설에 헌신한 그의 삶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나를 자극하고 일깨울 것이다. 불의한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에 순응하지 말고 저항하고, 조직하며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메시지를 그는 남기고 간 것 같다. 우리, 조성민 동지가 생전에 좋아한 반자본주의 록밴드 RATM의 음악을 들으며 2012년을 질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