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동지의 혁명적 신념과 실천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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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성민 동지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어느 날 국제사회주의자(IS) 단체 회합에서였다. 당시 그는 전국학생정치연합의 간부로 활동하다 1997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 출소한 뒤 IS에 막 가입한 신입회원이었다. 그 날 조성민 동지가 앞에 나와 자신감 있고 명료한 언어로 주장을 펼쳤던 것이 두고두고 인상에 남았다.
국제사회주의자(IS) 단체는 1992년 첫 국가 탄압을 받은 이래 지속적으로 탄압받았기 때문에, 당시 신입회원 가입은 드문 경우였다. 게다가 옥고를 치른 지 얼마 안 돼 가입한 신입회원은 더더욱 드물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면 소련이나 북한 같은 억압적 체제를 건설하려는 사람 취급받으며 경멸이나 비웃음을 받곤 했던 시절, 무엇보다 혁명적 신념을 말이나 글로 펼치면 언제 감옥에 끌려갈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동시에 온건한 정치활동은 인정되기도 하는 모순된 시기였다.
1990년대의 우경화된 이데올로기 지형과 혁명적 경향에 대한 국가의 혹심한 탄압 때문에 1990년대 내내 IS 회원 수는 1백수십 명을 넘기 힘들었고, 고립감과 생활고 등으로 중도에 활동을 그만둔 회원들도 많았다.
신입회원 조성민 동지에게서 느꼈던 혁명적 열정은 그가 사망 며칠 전 〈레프트21〉에 쓴 기사(‘1960년대 미국 민중 저항과 반전 운동’)에서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었다.
2000년대는 내가 조성민 동지와 좀 더 각별(?)해진 시기였다. IS는 1999년 말 오랜 탄압에서 비롯한 정치적 고립(과 그로 인한 정치적 타성)을 극복하고 새롭게 급진화하는 활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조직상 전술 전환을 했다. 그래서 나는 30세에 다시 대학에서 활동하게 됐는데, 2000년대 초반 대학원에 다니면서 조성민 동지와 같은 대학(한양대)에서 활동하면서 어떻게 대학생들을 만날지 의논하곤 했다.
처음 대학에서 활동할 때 참으로 막막했던 게 생각난다. 당시 IS 출신 회원들은 공개 활동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학교에 뿌리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활동했는데, 우리는 대학에서 공개토론회를 열고 신문판매를 하면서 대학생들과 만나려고 애썼다.
조성민 동지는 회의나 모임에서 농담을 자주 했는데, ‘썰렁한’ 농담을 한 뒤에도 스스로 대견해하곤 했다. 당시 나는 그의 언어유희(말장난)를 자신(29세)보다 나이 어린 대학생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일부러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 적 있다(오늘 영안실에 왔던 한 회원에게 들은 얘기로는 그가 개그콘서트 흉내를 잘 냈다니 기량이 꽤 발전했던 듯하다).
이 시기 한양대에서 우리의 활동은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자신이 과거의 오랜 비합법 활동에서 비롯한 잘못된 습성(수동성, 종파성 등)을 떨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
그러나 실질적 성과가 없거나 활동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면 사기가 떨어지기 쉬운 법. 조성민 동지는 2000년대 초반 몇 년 간 대학에서 활동을 하다 민주노동당 중랑구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동안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내가 2000년대 중후반 민주노동당 중랑구위원회에서 활동할 때 그가 활동에 복귀해 다시 함께 일하게 됐다. 2006~2007년에 그는 민주노동당에서 만난 노동자들과 자주 어울려 토론하고 과거보다 더 규율 있게 활동해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조 동지는 이론에 관심이 많고 핵심을 잘 포착하는 능력이 있어 유능한 교육가·선전가가 될 잠재력이 있었다. 2000년대에 그 잠재력은 그가 한동안 사기가 떨어지면서 많이 발휘되지 못했지만 2007년 이후에는 다시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 단체가 2005~2007년 활동의 문제점(민주노동당 전술에 대한 불명료함과 그로 인한 다함께 조직의 약화)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 그도 적극 부응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2010년 이후 아랍혁명, 유럽 노동자 투쟁, 99퍼센트 운동 등 세계적 반란 성장과 함께 그의 자신감과 활동력이 높아지면서 그의 재능을 다시금 〈레프트21〉에서도 수차례 보게 됐다. 그 기량을 본격적으로 펼치려 하는 찰나에 운명의 장난처럼 그는 가버렸다. 안타깝다.
이른 죽음으로 피다 만 조성민 동지의 삶은 매우 아쉽지만, 그동안 그의 기여는 결코 적지 않다. 많지 않은 과외수업료로 생활하면서 지금껏 사회 변혁 운동과 조직 건설에 헌신한 그의 삶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나를 자극하고 일깨울 것이다. 불의한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에 순응하지 말고 저항하고, 조직하며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메시지를 그는 남기고 간 것 같다. 우리, 조성민 동지가 생전에 좋아한 반자본주의 록밴드 RATM의 음악을 들으며 2012년을 질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