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 맞섰던 고문의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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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근태를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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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30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 고문이 숨을 거둔 후 고인을 추모하는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고인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며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다.
이 때문에 고인은 독재자들의 혹심한 탄압을 당했고, 특히 1985년에는 체포돼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무려 23일간 물 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하며 “죽음”의 문 앞까지 갔다. 고인은 용감하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고, 이것은 군부의 폭압 통치에 균열을 내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고문은 그의 육체에 심각한 상흔을 남겼다. 고인은 오랜 기간의 물 고문 후유증으로 비염과 축농증에 시달렸고 파킨슨병을 앓았다. 결국 이번에 뇌정맥 혈전증에 폐렴 등의 합병증까지 겹치면서 숨을 거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궤적과 비극적 죽음을 돌아보며 가슴 아파하고 있다. 야만적 고문의 후유증이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정말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전두환 등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은 아직도 제대로 단죄되지 않고 있다. 고인에게 고문을 가했던 이근안은 자신이 저질렀던 일을 “애국 행위”이고 “예술”이었다고 정당화하고 있다. 이제 “공안 목사”로 변신한 이근안은 여전히 ‘내가 잡았던 간첩들이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것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거나, ‘북한 찬양하는 전교조를 간첩죄로 잡아 들여야 한다’는 저주를 퍼붓고 있다.
물론, 고인은 혁명보다는 개혁을 추구했고, 1990년대 초·중반부터 부르주아 개혁 정치인의 길을 걸으며 여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인이 몸 담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노동악법 제정, 한미FTA 추진, 이라크 파병 등을 통해 노동자·민중을 고통에 빠트렸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민주화 운동에 대한 고인의 기여를 부정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고인은 사망 얼마 전에 쓴 글에서 1퍼센트만을 위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99퍼센트 대중의 분노에 공감을 나타냈다. 99퍼센트의 분노를 행동으로 건설하며 1퍼센트만을 위한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고인의 삶과 투쟁은 영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