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왜곡에 맞서 노동 계급의 대의를 옹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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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작할 얘기는 혁명에 대한 검찰의 인식에 관해서입니다.
검찰이 제 심문 과정과 공소장에서 '혁명'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를 '폭력에 굶주린 자'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공소장에는 '폭력혁명', '폭력혁명으로 타도하고', '폭력으로 정복하고' 등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건 무척 짜증나는 일입니다. 원래 혁명이 무엇입니까? 혁명은 기존 권력자들, 또는 지배 계급을 많고 많은 사람들, 즉 대중이 직접 행동에 나서서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려가지 않으려는 자들과 끌어내려는 대중 사이의 폭력, 다시 말해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오히려 이러한 충돌이 거의 없었던, 즉 권력자들이 예외적으로 비교적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온 혁명을 가리킬 때 특별한 수식어를 붙여 부르는 게 보통입니다. 예컨대 1989년 체코의 '부드러운 혁명' 즉 '벨벳 혁명'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검찰이 즐겨쓰는 '폭력혁명'이란 말은 참 이상한 겁니다. 마치 '야구'를 그냥 야구라고 부르면 되는데 '투수가 있는 야구'라고 부르면 참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투수가 없는 야구'야 말로 예외적이거나 야구라 부르기 애매한 겁니다. 바꿔 말하면, 권력자들과 대중의 충돌 없는 혁명이야말로 예외적이거나 혁명이라 부르기에 모자란 겁니다.
물론, 검찰이 단지 어리석어서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 건 아닐 겁니다. 혁명의 이미지를 왜곡하는 데 쓸모가 있으니까 즐겨 쓰는 겁니다. 검찰이 원하는 이미지는, 영화 〈슬레이어〉의 한 장면 같은 겁니다. 어둠이 내리면,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들이 인간들이 사는 마을을 향해 쳐들어 가는 장면 말입니다. 이런 섬뜩한 이미지를 사람들이 '혁명'이란 단어에서 떠올리길 바라는 겁니다. 그러나 혁명은 악령에 씌인 비합리적 폭력의 분출이 아닙니다.
혁명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영감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억압받고 착취받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축제입니다. 이슬람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여성차별을 반대하며 행진했던 1979년 이란 혁명처럼 말입니다.
혁명은 가장 강력한 독재자보다 역사의 복수가 더 무섭다는 걸 보여 줍니다. 1960년 4·19 혁명은 국가보안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구속된 자들은 늙은 독재자의 수족들뿐 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혁명은 맨손의 청년이 탱크 대열을 멈춰 세웠던 1989년 천안문 광장의 장면처럼, 그렇게 도저히 지워버릴 수가 없는 용기와 저항의 이미지입니다.
만약 검찰이 내 짐작과는 다르게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혁명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싶은 것도 아니라면 검찰은 분명히 쿠데타를 혁명과 혼동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려 40년 동안 일관되게 쿠데타를 혁명이었다고 우기는 사람이 바로 1년 전만 해도 이 나라 정부의 국무총리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검찰의 혼동은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지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왜 나는 구속·기소하면서, 김종필은 40년 동안 구속·기소하지 않습니까? 그는 5·16 쿠데타에 가담해 '국가 존립과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실제 행동으로 '위태롭게'했고, '국가 변란'을 단지 선전·선동한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실천했던 자인데, 왜 기소하지 않습니까? 공소 시효가 지난 게 아닙니다. 게다가 여전히 그는, 검찰 표현을 빌리자면 '폭력' 쿠테타를 찬양·고무하고 있습니다.
검찰이 '폭력혁명'이란 표현을 즐겨 쓰는 진짜 이유가 내가 말한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이든 간에 한 가지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검찰은 거의 모든 혁명을 싫어한다는 거죠. 1905∼1917년 러시아 혁명을 필두로, 1918년 독일 혁명, 1927년 중국 혁명, 1936년 스페인 혁명, 1949년 중국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 1973년 칠레 혁명, 1974년 포르투갈 혁명, 1979년 이란 혁명, 1989년 동유럽 혁명, 1998년 인도네시아 혁명까지 20세기의 모든 혁명들이 소위 '폭력 혁명'이니까 말입니다.
이제 '혁명'은 그만 얘기하고 '폭력'을 얘기해 봅시다.
저는 모든 폭력을 반대하는 '비폭력주의자'는 아닙니다. 예컨대 저는 집회와 행진·파업 대오를 지키기 위한 우리 운동의 폭력, 광주 항쟁에서 공수 부대를 향한 시민군의 폭력은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어떤 종류의 폭력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서 반대했습니다. 이 일에 내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들을 기꺼이 바쳤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지난 여름 술마시고 임산부와 장애인까지 두들겨 팬 김대중 정부의 '짭새' 폭력, 공무원들이 저축한 연금을 주인 허락도 없이 유용해 주식 투자로 다 날려 버리고 다시 공무원들에게 돈 내놓으라는 김대중 정부의 '조폭근성', 민영화와 구조조정만이 살 길이라고 협박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미래를 강매하려는 김대중 정부와 사장들의 잔인한 집단 폭력을 반대합니다.
또, 매향리에서 주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미 제국주의의 폭력을 반대합니다. 노근리 학살은 모르는 일이라고 우겨서 원혼들을 두번이나 죽이는 미 제국주의를 반대합니다. 자신의 경비견 이스라엘이 벌이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학살 지원하기, NMD·TMD 미사일 체제를 개발해 각국 정부의 무기 경쟁 부추기기, 에이즈 치료제를 싼 값에 보급하면 큰 코 다칠 줄 알라고 제3세계 정부들 협박하기 등등 사악한 미 제국주의의 모든 폭력을 반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개발 국가 차원의 '존립'과 '안전' 정도가 아니라 '전인류의 존립과 아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어마어마한 폭력, 즉 핵무기와 핵 에너지 모두를 열렬히 반대합니다.
과연 이 가운데 검찰이 나처럼 반대하는 게 한 가지라고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다시는 검찰은 나를 비롯해 우리 운동 앞에서 '폭력' 운운하지 마십시오.
공식적으로 인정된 경우만 따져도 한국에서 하루 9명의 노동자가 산업 재해나 직업병으로 죽습니다. 하루에 25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직업병에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산업재해율 전세계 부동의 1위입니다. 세계 7위의 장시간 노동과 근로기준법을 밥먹듯이 어기는 사장들 때문입니다. 왜 이 범죄를 기소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기소합니까? 왜 대우자동차 노동자의 아기 분유값까지 가로채 달아난 김우중을 체포하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월세방에서 전전할 나를 잡기 위해선 휴대폰 감청에, 집회 사찰, 잠복, 경찰 첩자 투입, 감시, 협박에 창문까지 뜯고 구두발로 쳐들어 오면서 9시 뉴스에서 그의 거주지가 만천하에 공개된 김우중을 왜 체포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