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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 이명박을 능가하는 1퍼센트·부패 우파의 대변자

박근혜가 한나라당 ‘쇄신’을 추진하는 현재 상황만큼 어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지난 4년간 이명박 뒤에 가려져 있었지만 박근혜와 친박계는 친미·친부자·반노동·부패 우익이라는 점에서 친이계를 능가한다.

박근혜는 오랫동안 독재자 박정희의 정치적 계승자임을 자처해 왔다. “[박정희가] 국가에 대해 품으셨던 그 원대한 꿈[을] … 역사 속에서 바른 평가를 받으시게 하는 것, 오매불망 그것만이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 해야 할 일이었다.”(박근혜 일기 모음집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실컷 잘 먹고 나서 그릇 한두 개 깬 것만 가지고 욕을 하는 풍토”(《신동아》 1989년 10월호)라며 간단히 무시했다. 2002년 한나라당에서 탈당해 만든 한국미래연합의 창당일을 5월 16일[1960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한 날]로 잡으려고도 했다.

박근혜는 광주 민중 수천 명을 학살한 군사독재자 전두환도 “어렵고 혼란의 시기에 나라를 잘 이끌려고 노력한 분”이라고 칭송했다.

1999년에는 ‘재벌 개혁’을 언급한 김대중의 8·15 경축사를 두고 “대통령 주변의 정책 입안자나 참모 가운데 사회주의적 시각을 지닌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며 색깔론을 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 박근혜는 사학법 개정을 “사회주의 빨갱이 법안”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정수장학회

박근혜는 한나라당 비리를 뿌리뽑겠다고 하지만, 박근혜 자신이 비리 의혹 덩어리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박근혜에게 이명박의 ‘BBK’와 같은 존재다. 박정희는 1962년 부산의 한 기업가를 구속한 후 그의 재산을 강탈해 박정희의 ‘정’자와 처 육영수의 ‘수’자를 딴 ‘정수장학회’를 만들었다. 박근혜는 이 ‘장물’을 물려받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한나라당 비대위원 이준석조차 “박 위원장이 정수장학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정수장학회가 소유하고 있는 〈부산일보〉의 노조가 편집권 독립과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을 요구하자, 재단은 노조 위원장을 해고하고 관련 기사를 막으려고 신문 발행을 중단시켰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부패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다. 불법 대선자금으로 문제가 됐던 1997년에 박근혜는 선대위 고문이었고, 차떼기 불법선거를 했던 2002년에는 선대위 의장이었다. 검찰은 2002년 대선 직전에 한국미래연합에서 한나라당으로 돌아오면서 2억 원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박근혜의 핵심 측근인 서청원은 2008년 ‘공천헌금’ 수십억 원을 받고 친박연대 비례대표를 배정했다. 최근에도 박근혜의 측근 의원 이성헌이 부산저축은행 로비에 연루된 혐의로 소환됐다.

박근혜 동생 박지만도 삼화저축은행 비리 연루 의혹을 받고 있다. 삼화저축은행 로비 자금이 한나라당 전당대회로 흘러들어왔을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어, 이번 ‘돈봉투’ 파문이 박지만 의혹으로까지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 31일 ‘한미FTA 날치기 무효! 디도스 테러 한나라당 해체! 범국민 촛불 대회’ 한나라당에는 밀 애도 없고, 미래도 없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박근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밀린 것이다. 우파들조차 박근혜보다 이명박이 차라리 낫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명박의 몰락 속에 다시 박근혜가 우파들의 구원투수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무대의 전면에 나서면서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에 앞장서 ‘신묘 5적’으로 등극했고, 연 3억 원 이상 소득자에 대한 ‘부자증세’조차 반대했으며 국회 차원의 김정일 조문단 구성 제안도 거절했다.

따라서 박근혜는 대세론의 거품이 계속 빠지며 한나라당과 함께 몰락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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