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에 맞서 싸우는 이집트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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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이집트 전국의 국립대학과 사립대학 노동자와 학생 들이 파업을 벌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학가에서 볼 수 없었던 대규모 투쟁이었다.
이날은 호스니 무바라크가 시위와 파업의 압력으로 사임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파업 참가자들은 이집트 군부에 권력을 민간 정부에게 넘기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장군들을 처벌해야 한다고도 요구했다. 장군들은 지난 1년 동안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이날 시위에 참가하면서 학교 수백 곳이 문을 닫았다.
1919년 영국 점령에 항의하는 혁명 이후 이런 행동이 벌어지기는 처음이다. 이번 학생 파업 직전에 포트 사이드 축구 경기장에서 알아흘리 팬 70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최고군사위원회와 보안군이 지난해 혁명을 지지했던 조직된 축구팬들 — ‘울트라스’ — 에 보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이 학살 사건에 충격받았다. 이 사건으로 이집트 중간계급뿐 아니라 일부 엘리트들까지도 최고군사위원회에 등을 돌리게 됐다.
학살 이후 알렉산드리아, 만수라, 마할라, 바니 수에프에서 이집트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RS)가 탄압을 당했다. 사복 경찰과 보안군은 RS 활동가들을 습격해 2월 11일 파업을 지지하는 현수막을 찢었고 이 단체의 붉은 깃발을 불태웠다.
국영 언론과 무슬림형제단 신문 — 양자 모두 2월 11일 파업에 반대했다 — 도 RS를 모함하는 움직임에 동참했다. 그들은 RS가 폭력과 파업을 조장해 경제를 파괴하며, 심지어 CIA 요원이라고 모함했다.
모함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 운동 회원이 다수인 이집트 국회의원들도 파업을 비난했다. 이 두 집단은 지난해에도 최고군사위원회에 맞선 투쟁에 참가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군부와 권력을 분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장군들에게 안전을 보장했다.
1월 23일 개회한 의회는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표적이 됐다. 대다수 의원이 내무부의 시위대 탄압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RS는 계속 투쟁을 조직했다. 그들은 다른 정치 단체들과 손을 잡고 2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벌여 카이로의 국방부 건물을 포위했다.
같은 날 다른 주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학과 학교의 파업은 성공적이었지만 다른 곳 노동자들의 반응은 약했다.
이것은 예상된 것이었다. RS를 포함해 그 어떤 정치 세력도 아직 작업장에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집트독립노조연맹은 이번 파업을 지지했다. 명목상 이 단체는 노동자 2백만 명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 신생 단체는 아직 기층 노동자들 사이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어용노조는 이번 파업에 반대하는 전쟁을 벌였다. 어용노조 소속인 지상운송노조는 버스 운전사들에게 강제로 버스 앞 창에 파업을 비난하는 현수막을 붙이도록 했다.
대학가의 상황은 훨씬 좋았다.
혁명 이후 많은 대학에서 좀더 독립적인 학생회와 학생 정치 모임이 조직됐다. 이 조직들은 이번 파업 조직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파업을 계획하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양대 투쟁 무기들 — 혁명 정당과 독립 노동조합 — 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