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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위기는 계속된다

아래 글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석학이자 활동가인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영국의 반자본주의 계간지인 《인터내셔널 소셜리즘》133호(2012년 겨울호)에 쓴 글이다. 여전히 계속되는 세계 자본주의 위기의 현 상황에 대해 분석하면서 미국의 ‘점거하라’ 운동과 이집트 혁명 등 그것이 촉발한 저항의 발전 전망과 과제들을 다루고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이며,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장이다.

2012년이 시작되지만 세계는 여전히 1930년대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점차 모든 사람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이 글에서 “이 잡지”라는 용어는 모두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을 뜻한다 — 옮긴이]의 지난 호[《마르크스21》 12호에 수록된 알렉스 캘리니코스, ‘우리 시대의 경제 위기’를 뜻한다 — 옮긴이]에서 경제 위기의 기본 윤곽을 요약한 이후 아직까지 변한 것은 없다. 한편으로, 두 주요 선진 자본주의 지역(미국과 유럽연합)의 대부분에서 은행과 소비자들은 여전히 2000년대 중반의 신용 호황기에 누적된 부채와 (은행의 경우) 2007~08년 호황 붕괴 당시 입은 막대한 손실의 부담에 짓눌려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유럽연합의 정치 엘리트들은 내분에 휩싸여 마비돼 있다. 그 내분은 무엇보다 정부 부채 증가에서 비롯했는데, 이 정부 부채 증가는 경제 위기와 은행 구제금융과 재정적 경기 부양책(2008년 가을 금융 대폭락 때 정부의 초기 대응책)의 결과였다. 각국 중앙은행의 노력으로는 정책상의 간극을 메우기에 불충분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가장 중요한 사태 전개는 경제 위기의 최근 국면이 그 진앙지인 미국과 유럽에서 다른 지역들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2011년 11월 중국의 금융 담당 부총리 왕치산은 중국이 경제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과 사뭇 다른 주장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지금 세계경제 상황은 지극히 심각하고,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글로벌 위기에서 비롯한 세계적 경제 불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리라는 것이다.”[1]

이번 호에 실린 제인 하디와 에이드리언 버드의 중요한 글은 중국 경제와 사회 전체에서 고조되는 긴장을 살펴본다. 지금 우리는 2008~09년의 불황을 갑자기 중단시킨 저금리 대출의 홍수 덕분에 누리게 된 경제 호황이 붕괴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2011년 11월 중국의 제조업 구매관리지수는 2개월 연속 하락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12월 초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수많은 공장이 … 비용 상승, 노동력 부족, 수익 감소, 해외 신규 주문 급감 등 온갖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2] 다른 ‘신흥 시장’ 경제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2010년에 7.5퍼센트 성장했던 브라질 경제는 2011년 3사분기에 지지부진했다.[3]

새로운 파업 물결이 중국 남부를 강타했다. 그곳 노동자들은 해외 주문 감소, 특히 유로존에서 주문이 감소한 탓에 잔업이 줄었다. 그동안 중국 당국은 물가 인상을 유발하는 호황이 통제 불능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고삐를 죄는 데 몰두했으나 이제는 그런 억제 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십중팔구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 — 옮긴이]와 협력해서 그리 했을 것이고, 연준은 11월 말 유럽중앙은행에 달러를 빌려줄 때 적용하는 금리를 낮춰서 유럽의 금융 시스템을 지원했다.

다른 주요국 중앙은행들과 조율을 거친 연준의 이런 조처는 영국은행 총재인 머빈 킹이 “신용 경색의 초기 징후”라고 부른 것(2007~08년 위기의 첫 국면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유로존의 통합이 유지될까 하는 두려움이 커지자, 유럽의 은행들은 채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렵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2011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부채 총액의 거의 3분의 2를 채권시장이 감당했다. 그런데 지난 몇 달 동안 대다수 은행들은 채권시장을 이용할 수 없었다.[4]

유럽의 은행들은 2007~08년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궁지에 몰렸으나 각국 정부와 유럽연합 당국의 공모 덕분에 그 손실을 은폐할 수 있었는데 이제 금융 시스템의 다른 부분들까지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중소 규모 기업들은 이미 신용을 얻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유럽의 은행들은 레버리지(자기자본과 부채의 비율)를 낮추는 데 여념이 없어서 무역금융, 신흥 시장, 인수·합병 같은 분야에서 발을 빼고 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정책 마비의 중요한 예외가 하나 있다. 긴축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긴축 정책을 주도하는 자들이 영국의 보수당·자민당 연립정부를 지배하는 사립학교 출신 대처 추종자들이든 아니면 지금 유로존을 통치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그룹’(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국제통화기금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새 총재 마리오 드라기,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조제 마누엘 바호주와 경제·통화 담당 집행위원 올리 렌, 유럽 이사회 상임의장 헤르만 반롬푀이,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회담 — 옮긴이] 의장 장클로드 융커)의 선출되지도 않고 책임지지도 않는 자들이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강요한 ‘테크노크라트’ 정부들이든 간에 말이다.[5] 유로존 정부들의 재정 통합을 강화하자는 메르켈과 사르코지의 제안들은 진정한 정치적 연합(부르주아 민주주의로 표현된 제한적 형태의 국민주권을 바탕으로 한)을 향한 움직임이 아니다.

평론가 볼프강 뮌차우가 지적하듯이 “언론 보도와 반대로, 메르켈은 재정 통합을 제안하지 않았다. 메르켈이 제안한 것은 긴축 클럽, 일종의 확대된 안정 협약이다. 그 협약의 목표는 각국 헌법에 균형예산 조항을 포함시켜서 상시적 긴축을 강화하는 것이다.”[6] 사르코지의 제안은 약간 달랐다. 메르켈과 달리 사르코지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 사법재판소가 아니라 각국 정부가 긴축 정책을 감독하기를 원했다. 12월 초에 메르켈과 사르코지가 이룬 합의는 사르코지보다 메르켈에게 유리했는데, 이것은 독일과 프랑스의 세력 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합의가 시행된다면 프랑크푸르트 그룹의 지배를 제도화할 것이다. 판사들이 각국의 예산을 심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경제 정책 통제권을 선출된 정치인들한테서 빼앗아 ‘전문가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강박관념이 확대된 것이다.(중앙은행의 독립은 똑같은 과정의 초기 단계다.)

이런 정책들을 받아들인 12월 8~9일의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는 데이비드 캐머런의 ‘거부권’이 단연 두드러졌다. 캐머런은 메르켈의 제안을 거부하며, 새로운 재정 정책 레짐을 유럽연합 자체에 적용하지 말고 기존의 유로존 정부들과 새 정책 레짐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국가들에만 적용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유로화 위기와 유로존 통합 강화 움직임 때문에 영국 보수당 내에서 유럽 문제가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유럽 문제는 1990년대에 마거릿 대처 정부와 존 메이저 정부를 파멸시킨 쟁점이다.) 캐머런은 평의원들의 대대적인 반란을 막을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은 유럽연합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대처 집권기에 〈선〉의 편집장을 지낸 켈빈 매켄지는 자신이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말했듯이 “기뻐서 춤을 췄을지” 모르지만, 캐머런의 연립정부 파트너인 자민당은 격분했다. 비록 자민당은 선거 패배로 연립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여전히 두려워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유로존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 때문에 영국 자본주의가 유럽연합에서 누리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1991년 메이저가 협상 끝에 영국의 마스트리히트 조약 불참을 인정받은 이후, 그리고 1997년 고든 브라운이 영국의 유로화 참여를 봉쇄한 후 영국 자본주의는 유럽연합에 양다리를 걸치고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영국은 파운드화를 유지한 덕분에 경제 위기의 강력한 충격파를 더 쉽게 흡수할 수 있었고 단일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런던시티[영국의 금융 중심가 — 옮긴이]는 유럽의 대형 은행들이 세계로 진출하는 발판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캐머런과 메르켈·사르코지의 협상이 런던시티 규제 문제를 둘러싸고 결렬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영국 경제가 지나치게 금융에 의존하는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연립정부의 약속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메르켈과 사르코지는 런던이 아니라 프랑크푸르트와 파리가 유로존의 새 금융 중심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장기적 문제들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앞으로 재정 규율을 강화하겠다는 약속만으로 금융시장이 유로존의 취약한 국가들을 디폴트 상태로 몰아가지 않을 것인지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영국과 유로존 경제가 모두 올해 수축할 것이라는 예측이 확산되고 있다.[7]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은 긴축이 불합리하다고 지적했고, 다양한 기술적 수단들로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유효수요를 늘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 엘리트들은 이런 비판과 제안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보수당 소속 재무장관 조지 오스본이 11월 29일 추계보고서[해마다 가을에 의회에 제출하는 경제 예측 보고서 — 옮긴이]를 발표하면서 취한 태도가 전형적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긴축 정책으로 경제가 둔화하고 그래서 정부 차입이 늘고 있어서 오스본이 자신의 목표(불황에서 비롯하지 않은 재정 적자분을 2015년까지 완전히 청산하겠다는)를 달성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 분명해졌는데도 오스본은 정책 노선의 변경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공공부문 임금을 더욱 억제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이렇게 긴축 정책에 집착하는 것을 단지 지적 오류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결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계급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중국 부총리 왕치산이 강조한 경제적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지난 세대 동안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지배한 신자유주의 연합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경제 위기의 대가를 자신들이 치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부와 소득의 분배 구조가 엄청나게 왜곡됐는데, 이런 구조를 계속 유지시키겠다는 것이고, 결코 끝날 조짐이 안 보이는 경제적 재앙의 비용을 노동자와 빈민 들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반자본주의의 지평이 열리다

다행히, 긴축 정책에 맞선 저항이 점점 더 고양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무엇보다도 2011년 11월 30일의 공공부문 대중 파업이 그런 저항의 한 형태였다. 이 잡지에 실린 찰리 킴버의 글은 이 근본적 발전을 분석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맥락도 크게 변했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이하 OWS) 운동이 2011년 9월 중순 처음 등장한 이후 미친 영향은 정말 놀라울 정도다.

첫째, OWS는 미국에서 정치적 논쟁의 구도를 바꿔 놓았다. 버락 오바마가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데 정치적으로 실패하자(전에 오바마의 보좌관이었던 람 이매뉴얼은 이번 같은 경제 위기는 그냥 흘려보내기에 너무 아깝다고 말하면서 [구조조정의 기회로 이용하자고 — 옮긴이] 주장했다) 공화당 우파, 특히 티파티 운동이 주도권을 쥐게 됐다. 그러나 은행과 그 밖의 기업 엘리트들을 표적으로 삼은 OWS의 강력한 영향 때문에 티파티 운동의 기반이 비교적 협소하다는 사실이 밝히 드러났다. “1퍼센트 대 99퍼센트”라는 구호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적대 개념을 대중의 언어로 바꿔 놓았고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OWS의 영향은 10월 15일 국제 행동의 날(원래 스페인의 ‘5월 15일 운동’이 호소한 것이었다)에 전 세계에서 약 1백만 명이 참가한 것에서도 드러났다. 또, 미국 전역과 외국에서도 OWS를 모방한 운동이 확산된 것과, 미국의 노동조합들과 (더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일부 민주당 정치인들이 신속하게 반응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 잡지에 실린 메건 트루델의 글은 미국 노동계급 저항의 부활 조짐과 ‘점거하라’ 운동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본다.

‘점거하라’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기는 쉽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그 운동은 다양한 관점을 포괄한다.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부터(심지어 미국의 우파 자유지상주의자인 론 폴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정화淨化하기를 바란다) 훨씬 더 날카로운 아나키즘과 자율주의 정치 지지자들까지 아주 다양하다. ‘점거하라’ 운동이 혁명적 좌파를 환영하는 정도도 지역에 따라 달랐다. 그리고 ‘점거하라’ 운동이 미친 영향은 대체로 상징적이었다. 비록 미국의 일부 도시들(뉴욕 자체를 제외하면, 경찰의 만행이 11월 초에 대중 ‘파업’을 촉발한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 같은 곳)에서는 ‘점거하라’ 운동이 더 심각한 사회적 영향을 미쳤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점거하라’ 운동은 1999년 11월 시애틀 시위에서 시작된 과정, 즉 단지 특수한 불만들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체제 자체를 표적 삼아 다양한 사람들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적 급진화 과정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줬다. ‘점거하라’ 운동은 시애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대안 세계화 운동의 특징들을 많이 공유한다. 예컨대, 앞서 말한 이데올로기적 이질성, 매우 문제가 많은 만장일치제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의존 등이 그렇다. 그러나 ‘점거하라’ 운동은 급진화 과정의 속도가 빨라졌음을 보여 준다. 10월 15일 국제 행동은 OWS가 등장한 지 몇 주 만에 일어났지만, 유럽의 반자본주의 네트워크들은 시애틀 시위 후 거의 1년 만인 2000년 9월에야 프라하에서 첫 번째 대규모 시위를 벌일 수 있었다.

이렇게 속도가 빨라진 것은 무엇보다 경제 위기의 충격을 반영한다. 끝날 조짐이 안 보이는 불황이 4년 넘게 계속되고 경제·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신뢰가 거의 바닥나면서, 자본주의 자체에 책임을 묻고 체제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물론 시위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서 보았듯이, 긴축 정책은 1퍼센트가 99퍼센트에 맞서 계급 권력을 확립하려는 노력이다. 계급 권력에는 계급 권력으로 맞서야 한다. 영국 노동자 운동의 부활 조짐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과제는 ‘점거하라’ 운동에서 드러난 반자본주의적 상상력을 조직 노동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집단적 힘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집트: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

2011년 1~2월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점거에서 얻은 영감이 없었다면 ‘5월 15일 운동’과 ‘점거하라’ 운동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타흐리르’ 자체는 훨씬 더 복잡하지만 덜 뚜렷한 혁명적 과정의 상징이다.(사실, 알렉산드리아·수에즈·포트사이드 같은 도시들의 혁명적 과정에서는 노동계급 대중이 더 우세했고 더 전투적이었다.) 그렇지만 타흐리르 점거는 21세기에 집단적 자기 해방의 구체적 형상을 실제로 보여 주었다. 중동부 유럽과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무너진 뒤 유행했던 생각, 즉 혁명의 고전적 전통은 고갈됐다는 생각은 이제 매우 공허하게 보인다.

2012년 1월 27일 “분노의 날” 1주년 기념 행진

2011년 11월과 12월의 타흐리르 광장은 다시 한 번 중요한 전투의 현장이 됐다. 이번에는 청년 노동계급 투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투사들은 지금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최고군사위원회(이하 SCAF), 그리고 개편된 시위 진압 경찰과 충돌했다. 이 잡지에 실린 다른 글에서 앤 알렉산더가 보여 주듯이, 이 충돌은 지난 8월과 9월 독립 노동자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오래 전에 레닌이 썼듯이 “정치는 경제가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된 것이다.”[8]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 경제적 계급투쟁의 전개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니엘 벤사이드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아주 잘 표현했다. “레닌은 정치적 영역의 특수성을 깨달은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다. 정치적 영역은 다양한 권력과 사회적 적대 관계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정치 자체의 언어로 표현되는데, 그 정치의 언어는 바꿔치기, 요약, 실언失言으로 가득 차 있다.”[9] 정치는 사회적 모순들을 모두 집중시키기 때문에, 특정 투쟁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심지어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벌이는 투쟁의 논리로도 환원할 수 없다.) 더욱이, 정치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적대 관계만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모순들을, 계급 세력의 모든 스펙트럼의 상호작용을 집중시킨다.[10]

이집트의 혁명적 과정을 이해하려면 이런 정치관觀이 필수적이다. 이집트는 인구가 엄청나게 많은 복잡한 사회다. 이집트에는 자본가들과 노동자들뿐 아니라 관리-전문직 ‘신新중간계급’도 있고 점차 도시 빈민으로 변모하는 수많은 프티부르주아지도 있으며 농촌에는 상당수의 농민들이 있다.

최근의 이 극적인 사건을 촉발한 것은 SCAF의 오판이었다. 군사정부는 부르주아 질서의 안정을 신속히 회복하는 동시에 1952년 7월 자유장교단의 집권 이후 이집트 군대가 획득한 상당한 특권을 확고히 하고 싶어서, 민선 의회와 대통령을 뽑는 기나긴 과정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2013년까지 계속 권력을 휘두르겠다고 발표했다. 또, 군대 예산을 의회의 심사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포고령을 공포하기도 했다.

사실상, 선거 결과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런 조처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선진적인 혁명가들만 반발한 것이 아니라 SCAF가 이집트 사회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동맹을 맺으려 했던 정치 세력들, 즉 무슬림형제단과 심지어 일부 살라피들(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받는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의 이슬람주의 네트워크로서, 특히 이집트 남부인 상上이집트의 농촌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다)도 반발했다. 무슬림형제단 자체는 비록 경제적·사회적 관점이 보수적이지만,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에 반대하는 중요한 정치적 매개체가 됐다. 그 덕분에 무슬림형제단은, 1월 25일 혁명 직후에 우리가 주장했듯이, 이집트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더 광범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SCAF의 이상적 협력자가 됐다.[11] 지난해 7월 이집트 군대는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들이 조직한 대규모 시위를 정치적 가리개로 이용해, 혁명 순교자들의 유가족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벌이던 농성을 폭력적으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SCAF는 욕심이 지나쳐 제 발등을 찍었다. 선거 승리로 이제는 당연히 자신들이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군대가 계속 정치 과정을 감독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무슬림형제단과 일부 살라피들이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이나 좌파 정치 세력들과 일시적으로 가까워졌음을 보여 주는 대규모 시위대가 11월 18일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이 시위가 시위 진압 경찰이나 군대 자체와의 충돌로 발전하자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광장을 떠났다.(무슬림형제단 활동가들이 모두 그러지는 않았다.)

타흐리르 광장(과 그 밖의 이집트 도시들)에서 벌어진 충돌로 말미암아 일정한 세력 균형이 형성됐다. 한편으로, 샤밥(청년 노동계급 시위대)의 수가 너무 많고 그들의 영웅적 투쟁이 너무 강력해서 SCAF가 그들을 분쇄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물론 총기 발포와 최루가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다른 한편으로, 광장 점거자들은 자신들의 목표, 즉 군사정부 지도자인 후세인 탄타위 원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주된 이유는 SCAF가 민간 정부로의 정권 이양 일정을 앞당기겠다고 약속하며 양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슬림형제단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가 외친 요구, 즉 의회 선거 보이콧 요구를 무시했다. 그래서 11월 28~29일의 1단계 선거는 별다른 혼란 없이 제대로 진행됐다. 만약 타흐리르 광장 점거자들의 요구가 대중 파업으로 뒷받침됐다면, 세력 균형은 확실히 기울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독립노조연맹이 혁명가들에게 보낸 지지는 대체로 상징적이었다. 8월과 9월의 대중 파업은 이미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그 파업들은 노동계급 조직화의 폭과 깊이가 크게 진전했음을 보여 줬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를 많이 쟁취하지는 못했다.

더 넓게 보면, 스스로 조직된 상당한 소수와 대다수 사람들 사이에 간극이 벌어졌다. 즉, 혁명을 완수하려면 군대의 권력을 분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수의 사람들과 선거라는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대다수 사람들 사이에 간극이 벌어진 것이다. 혁명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선진적인 혁명가들이 선거 보이콧을 주장했다가 스스로 고립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1918년 11월 독일 혁명 직후 공산당이 그랬고, 1975년 4월 포르투갈 제헌의회 선거 때 초연한 태도를 취했던 일부 극좌파가 그랬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들, 특히 혁명을 접한 경험이 아직 비교적 미약한 농촌 지역 사람들은 더 많은 경험을 해 봐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더 고차원의 대안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호쌈 엘하말라위는 더 구체적인 동기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람들은 주로 SCAF가 물러나기를 바라는 일반적 염원에서 투표장으로 달려갔다.”[12] 무엇보다 1차 투표의 결과, 즉 무슬림형제단의 자유정의당과 살라피들의 누르당이 합쳐서 60퍼센트를 득표한 것이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이것은 이슬람주의가 마치 산사태처럼 이집트를 휩쓸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 대중이 다양한 정치적 선택들을 시험해 보는 과정의 초기 단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즉, 가장 친숙한 세력부터 하나씩 시험해 보는 것이다.

11월 23~27일 실시된 유고브[영국의 온라인 여론조사 업체 — 옮긴이]의 조사 결과는 대중 의식의 복잡한 상태를 힐끗 보여 준다.(이집트 전국에서 1천9백92명이 조사에 응했다.) 응답자의 약 46퍼센트는 군대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보장할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32퍼센트는 SCAF가 초안을 작성한 새 헌법대로 하면 “민간 정부가 새로 선출된 후에도 군대가 너무 많은 권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데 동의하기도 했다. 또, 48퍼센트는 시위가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이 수치는 소득 수준이 낮은 사람들(월 소득이 2백66달러 이하) 사이에서는 55퍼센트까지 올라갔다. 약 59퍼센트는 선거에서 투표에 참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13] 따라서 한편으로 사람들은 SCAF가 제시한 선거 경로를 기꺼이 따라가려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1월 이후 발전해 온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라는 전통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모든 사정을 감안할 때, 여름 이후의 상황은 이집트 혁명이 전진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청년 활동가들의 다수는 무바라크 정권 몰락 당시 유행했던 미사여구, 즉 군대와 국민의 단결이라는 미사여구를 꿰뚫어 보게 됐다. 노동자 운동은 크게 진전했다. 작업장과 거리에서 모두 자기 조직화가 발전했다. 장군들과 무슬림형제단의 불안한 협력은 심각한 난관에 직면할 것이다. 세계경제 위기가 생활수준에 가하는 압력이 끊임없는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이 그렇게 광범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집트 사회의 모든 모순이 무슬림형제단에 속속들이 퍼져 있다.

일간지 〈슈루크〉의 편집장 와일 가말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SCAF는 매우, 매우 취약하다. 타흐리르 광장에 10만 명이 모일 때마다 내각이 사퇴한다. 저들은 수세에 몰려 있다. 문제는 타흐리르 광장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압력을 가하고, SCAF 배후의 진정한 이해관계망과 대결하고, 작업장에서 구체제와 대결할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사회 변화를 위한 진정한 전투가 앞으로 벌어질 것이다.[14]

따라서 이집트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엘하말라위가 썼듯이 “투쟁의 물결, 밀물과 썰물이 있을 것이다. 전투에서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을 것이다.”[15] 최종 결과는 11월에 군대와 결정적으로 결별한 활동가들이 더 광범한 대중(이번에는 망설이고 머뭇거린)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려면, 노동자 운동이 더한층 발전해야 할 뿐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고 더 깊이 뿌리내린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 필요할 것이다.

출처: Alex Callinicos, ‘The Crisis wears on’, International Socialism 133(Winter 2012)

번역 : 이수현

참고 문헌

Anderlini, Jamil, 2011, “China Fears Lasting Worldwide Recession”, Financial Times (20 November),www.ft.com/cms/s/0/e0b044a2-1382-11e1-81dd-00144feabdc0.html#axzz1fMqSXeC3

Anderlini, Jamil, and Rahul Jacob, 2011, “Global Decline Drags Down Chinese Factories”, Financial Times (1 December),www.ft.com/cms/s/0/34feee8e-1c0a-11e1-9631-00144feabdc0.html#axzz1fMqSXeC3

Bensaïd, Daniel, 2004, Une Lente impatience (Stock).

Callinicos, Alex, 2011, “The Return of the Arab 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30 (spring), www.isj.org.uk/?id=717

El-Hamalawy, Hossam, 2011, “The November Uprising” (4 December), www.arabawy.org/2011/12/04/the-november-uprising/

Elliott, Larry, 2011, “The Emergence of the Frankfurt Group has Turned Back the Democratic Clock”, Guardian (8 November),www.guardian.co.uk/business/economics-blog/2011/nov/08/euro-papandreou-berlusconi-bailout-debt

Fisk, Robert, 2011, “‘The Real Fight for Democracy in Egypt Has Yet to Begin’”, Independent (1 December),www.independent.co.uk/opinion/commentators/fisk/robert-fisk-the-real-fight-for-democracy-in-egypt-has-yet-to-begin-6270155.html

Jenkins, Patrick, and Richard Milne, “Return of the Credit Crunch: Caught in the Grip”, Financial Times (1 December),www.ft.com/cms/s/0/289b547a-1c14-11e1-af09-00144feabdc0.html#axzz1fMqSXeC3

Lenin, VI, 1965, “The Trade Unions, the Present Situation and Trotsky’s Mistakes”, in Collected Works, volume 32 (Progress), 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20/dec/30.htm

Lukács, Georg, 1970, Lenin: A Study on the Unity of his Thought(NLB),www.marxists.org/archive/lukacs/works/1924/lenin/index.htm

Munchau, Wolfgang, 2011, “France and Germany Look Set to Fudge It Yet Again”,

Financial Times (4 December),www.ft.com/cms/s/0/874af280-1cde-11e1-a134-00144feabdc0.html#axzz1ffVQ97mQ

주석

[1] Anderlini, 2011.

[2] Anderlini and Jacob, 2011.

[3] http://uk.reuters.com/article/2011/12/06/brazil-economy-idUKN1E7B502O20111206

[4] Jenkins and Milne, 2011.

[5] Elliott, 2011를 보시오.

[6] Munchau, 2011.

[7] 게다가, 유명한 아웃사이더 두 명, 즉 마르크스주의자 존 윅스와 〈파이낸셜 타임스〉의 통화주의자 새뮤얼 브리턴이 긴축 경제학에 대한 케인스주의적 비판으로 수렴하는 것을 보면 흥미롭다. 예컨대, 윅스의 탁월한 블로그 http://jweeks.org/index.htm를 보시오.

[8] Lenin, 1965, p32.

[9] Bensaïd, 2004, p121.

[10] 레닌의 정치적 방법론에 관한 논의는 Lukács, 1970을 보시오.

[11] Callinicos, 2011, pp28-29.

[12] El-Hamalawy, 2011.

[13] 이 자료를 알려 준 앤 알렉산더에게 감사한다. 알렉산더가 이 자료를 분석한 글은 www.yougov.polis.cam.ac.uk/article/egypt-poll-voters-see-both-ballots-and-protests-key-change을 보시오.

[14] Fisk, 2011.

[15] El-Hamalaw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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