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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 자유민주주의 혹은 독재로 회귀?

1848년 대중 혁명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오늘날 우리가 아랍 혁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랍 혁명의 엄청난 규모에 놀란 평론가들은 역사에서 그에 견줄 사건을 찾아 보며 이 혁명의 성격을 이해하고 혁명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려 애쓴다. 이들은 거듭거듭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1848년 초 혁명은 2011년 중동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수도에서 다른 나라의 수도로 전진해 나갔다. 시실리의 봉기는 파리의 반란을 알리는 신호였다. 3일 만에 왕이 망명을 떠나고 공화국이 선포됐다. 혁명의 불꽃은 베를린으로, 빈으로, 부다페스트로, 밀란으로 번져 갔다. 혁명가들이 교황 주변의 스위스 출신 호위병을 물리치고 로마를 공화국으로 선포하자, 교황도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848년 초 넉 달 동안 총 50여 차례 반란이 터져 나왔다.

둘째, 1848년 혁명도 2011년 중동처럼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 정치적 자유와 의회 선출 등을 요구하는 민주주의 봉기로 시작했다.

1848년 유럽 ‘인민의 봄’이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날 ‘아랍의 봄’의 판박이처럼 보이는 셋째 이유는 혁명 이후 노동계급에 뿌리내린 대중적 사회주의 단체들이 출현했다는 점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상은 중동에서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예컨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의 공산당은 대중 정당으로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모두 중요한 사회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 정당들은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거듭거듭 자본가 계급의 ‘진보적’ 분파와 동맹하는 전략을 취했고, 그 결과는 늘 재앙이었다. 이 전략의 반복된 실패로 공산당이 점차 지지를 잃으면서, 그 공백을 틈타 정치적 이슬람*이 성장했다.

많은 평론가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가정은, 오늘날 중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적 흐름이 없기 때문에 아랍의 봄 앞에 남은 실질적인 문제는 민주주의가 승리하거나 권위주의가 겉모습만 달리한 채 되돌아 오거나(1848년 혁명의 결과가 그랬다)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1848년 혁명의 속성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소유 문제”라고 언급한 계급 문제가 처음엔 “인민”의 민주주의 혁명 안에 숨어 있었지만 점차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에서 일어난 정치 혁명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삶의 물질적 변화를 위해 전투에 나섰다는 신호다. 그래서 농부는 지주를 공격하고, 사유재산으로 바뀐 숲에 침입했다(때로는 삼색기를 앞세워 행진하기도 했다). 파업도 일어났는데, 특히 인쇄공과 건설 노조가 앞장섰다.

정치 사상에 대한 갈증이 분출했다. 집과 일터 주변에서 토론하고 조직하려고 모인 정치 클럽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1848년 봄에 이르자, 파리에서만 2백 개 정치 클럽이 회원 7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투쟁 성과 보존을 위한 중앙 협회’ 회원이 무려 50만 명에 이르렀다. 혁명적 신문도 두터운 독자층을 자랑했다.

과거 혁명에 동참했거나 적어도 동조했던 새 자본가 계급 중 일부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격변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 혁명 정부의 지도부 자리를 재빨리 낚아챘다.

이제 그들은 대중이 단지 지주들과 구질서에 속박된 사유재산뿐 아니라 모든 사유재산을 빼앗아갈까 봐 두려워했다. 1848년 6월, 새 부르주아 정부는 반란을 촉발했고 결국 파리를 피로 물들였다. 반란에 가담한 1천5백 명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포로 3천 명이 사살됐다. 수천 명이 투옥되고 국외로 추방됐다. 마르크스는 이 전투를 가리켜 “현대 사회를 양분하는 두 계급이 치른 첫 대전투”라고 일컬었다.

연속 혁명

파리의 반동은 다른 모든 지역에서 벌어질 반혁명을 향한 신호탄이었다. 그 뒤에도 반란은 몇 차례 더 이어지지만, 1849년 말이 되면 아래로부터 혁명은 완전히 패배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직 노동계급만이 농민을 대신해 혁명을 전진시키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의 이해관계, 우리의 임무는 혁명을 영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 스스로 다시 주장했듯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그런 구실을 하기엔 노동계급의 발전 정도가 너무 미약했다. 산업화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렀다. 심지어 파리조차 시장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긴 했지만 소규모 작업장과 장인식 생산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바로 이 점이 1848년과 아랍의 봄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늘날 이집트에만 노동계급이 수백만 명에 이른다. 이집트 마할라의 섬유 공장은 중동에서 가장 큰 공장이다. 겉보기에 아직까진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한 걸프 지역 국가들도 지난 30년 동안 자본주의가 도입되며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예컨대, 이 지역의 도시 거주민 비율은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쿠웨이트가 98퍼센트, 카타르가 96퍼센트, 사우디아라비아가 82퍼센트다.

“소유 문제”는 1848년보다 오늘날 아랍의 봄에서 더 핵심적인 과제다. 이 점은 예컨대 이집트와 튀니지(또는 쿠웨이트)에서 반복된 파업 물결을 통해 다시 드러났다. 불균등하긴 하지만 1백60년 넘게 이어진 전 세계적 자본주의 축적 덕분에 중동 지역에서 “혁명을 영속시킬” 잠재력이 더 커졌다. 2012년 중동의 노동계급은 1848년 유럽 어느 지역의 노동계급보다 거대하고 집중돼 있고 강력하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더 큰 사회 변화와 연결시킬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은 다시금 광범한 청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