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이가 아니라 저항과 연대를 건설하려는 ‘맑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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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료 문제 삼는 논리가 잘못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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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연대다함께의 ‘맑시즘’ 행사 강연료 방침을 문제 삼았던 〈경향신문〉 〈웹場〉(이하 웹장) 구성원들이 맑시즘 기획팀의 입장에 반박 성명 비슷한 걸 냈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다음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200개 단체의 후원과 1,500명에 달하는 참가자의 참가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사에게 강사료를 지급하지 않는 것이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맑시즘의 취지에 부합하는가.
“저희에겐 ‘맑시즘 포럼’이 … ‘한국 사회 변혁 운동을 전진시키기 위한 토론과 논의를 하는 장’ 혹은 ‘진보적 사회 변화 운동의 일부’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주장의 핵심은 웹장의 구성원들이 맑시즘 토론회를 ‘운동 건설을 위한 토론 행사’가 아닌 단순한 돈벌이 행사(이윤 추구 행위)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맑시즘 토론회가 수익을 목표로 하는 돈벌이 사업이라면, 주최측의 참가 티켓 판매는 수익을 남기려는 목적인 것이고, 주최측이 연사를 섭외하는 과정은 흥행에 유리한 사람을 골라 고용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참가비는 최소한의 예상 비용이 아니라 목표 수익을 근거로 책정될 테다.
이때 연사는 연사료를 받더라도 고용주의 수익을 위해 고용돼 착취 받는 임금노동자인 것이다. 이 경우엔 강연료를 주지 않으면 착취 정도가 아니라 고용주의 강탈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본다면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맑시즘은 99퍼센트의 저항 운동을 잘 건설할 대안을 모색하려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토론하는 행사다.
그러니 주최측도 연사도 돈벌이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 더 좋은 토론을 하려고 행사를 주최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토론회 청중도 대체로는 마찬가지 목적을 공유하기 때문에 참가비도 행사 준비와 원활하고 쾌적한 토론 참여를 위해 행사 비용을 분담·후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 시민단체나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언론들이 주최하는 다른 강연 행사와 비교해도 현격히 저렴한 참가비를 설명할 수가 없다.
또, 노동자연대다함께가 때론 적자도 감수하며 12년째 토론회를 대규모로 개최해 온 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을 때는 1백여 명에 이르는 진행팀들의 무보수 자원 활동에 담긴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알아볼 수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경향신문〉이 주최하는 ‘청소년저널리즘캠프’ 같은 행사는 2박 3일 참가비가 숙박비 포함 1인당 49만 5천 원이나 된다. 참여연대가 주관하는 강연 행사는 수익 사업이 목표가 아니겠지만, 강연 1회당 1만 원을 받는다.
반면 맑시즘은 나흘간 강연 17개를 듣는데 4만 원이고, 학교측이 행사를 방해하려고 에어콘 등을 끄면적자 감수하고 동력기와 에어콘 대여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더구나 청중은 단순한 피교육생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에 능동적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도 있다. 저항운동의 토론 축제 같은 셈이다.
지금껏 수백 명의 연사들이 연사료 없이도 기꺼이 참가해 즐거운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라도 더 운동의 대의를 알리려고 애를 쓰며 수준 높은 연설을 자발적으로 해 준 것도 바로 이런 행사의 취지와 목적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사료는 사용자의 의무인 임금 문제가 아니라 주최측과 참가자들을 대표해 감사의 표시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맑시즘 행사의 성격 때문에 주최측은 ‘연사료가 없다’면서도 매번 강연 후에 감사의 선물을 하는 것이고, 지방의 연사들에게는 차비를 지원하는 것이며, 일부 연사는 그런 차비조차도 사양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웹장의 구성원들은 ‘운동의 일부’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면서, 이처럼 고용 관계와 전혀 다른 연대와 공감으로 맺어지는 관계들과 행사의 목적에 공감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하지 않는다.
웹장의 기사와 입장이 불쾌한 까닭은 자신들의 이런 무지를 성찰하기보다 오히려 상대와 독자들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가디언〉은 세계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대안을 찾는 행사라고 영국의 맑시즘 행사를 "마르크스주의의 귀환"이라며 보도하며 홍보하기도 하는데, 한국에선 진보·개혁 언론이라는 〈경향신문〉에서 진보 토론 행사의 본질을 오도하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다.
〈경향신문〉도 2007년에는 고려대 당국이 학내 진보 활동을 규제하려는 목적으로 맑시즘2007 장소 사용을 불허하며 예고된 행사장의 수도와 전기까지 끊어버린 상황에서 “마르크스, ‘출교’”라는 제목으로 고려대 당국을 비판하는 칼럼을 내보낸 적이 있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큰 것일까.
저항과 연대
웹장의 주장과 달리, 맑시즘은 주최측과 연사, 청중이 맺는 관계가 수익을 위한 자본의 노동력 고용 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 연사료 지급 여부가 ‘노동의 가치’를 담보하는 기준이 될 수 있겠나.
맑시즘 행사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노동의 가치’가 있다면, 쌍용차 등 노동 투사들의 연대 호소에 참가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어떻게 연대를 확산할지, 왜 정리해고가 나쁜지 등에 공감하며, 진지하게 토론에 참가하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 불안정 노동과 청년 실업, 소수자 차별, 제국주의의 전쟁과 핵 위협, 기후 재앙 같은 문제들이 노동 중심의 변혁 전략과 결합돼서 해결 가능한지를 머리맞대는 것이야말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진지한 노력일 것이고, 그러한 결론에 공감하는 참가자들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건설할 것인지에서 명쾌한 공감과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으로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변혁 운동의 토론 행사를 수익 사업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맑시즘 주최측과 참가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노동의 가치’는 웹장의 성원들이 말하는 ‘교환가치로서 노동력 지불의 대가’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맑시즘 행사가 말하는 ‘노동의 가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에 맞서는 ‘노동운동의 가치’이고,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는 인간들 사이의 ‘연대의 가치’다.
물론 자본주의 현실에서 이런 행사를 하려면 큰 비용이 들고 불가피하게 참가자들도 비용을 분담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분담 형식이 티켓 판매 형식으로 드러나니, 일부에게는 참가 티켓 판매가 상품 판매 관계와 잘 구분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레프트21〉이 정부 후원이나 기업 광고 전혀 없이 독자들의 구독료만으로 운영하고, 필자들이 원고료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성 언론의 판매와는 개념이 다른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변혁 운동의 대의와 문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연대의 가치’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웹장의 구성원들의 발상은 자유주의적 관점일 뿐이다. 이는 자유주의가 99퍼센트 대중의 저항과 연대,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서 부적절하다는 것만 보여 줄 뿐이다.
그러므로 진보진영에 속한다는 일부 개인들이 진보적 운동 행사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흠집내기에 동조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