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인터넷 실명제 위헌 판결:
가상 공간은 가상이 아니다
〈노동자 연대〉 구독
〈메트릭스〉를 보면 네오가 가상 공간에서 스미스와 싸울 때 타격을 입으면 현실 공간의 네오가 타격을 입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현실 공간의 네오가 타격을 입어도 가상 공간의 네오가 타격을 입지만 비중 면에서 가상 공간이 현실을 압도한다.
얼마전 헌법재판소에서 나온 인터넷 실명제 위헌 판결을 보면 현실은 〈메트릭스〉와 정반대인 것 같다. 인터넷 실명제는 만들어질 때도 폐기될 때도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에 단단히 묶여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줬다.
현실 세계에서 만들어진 인터넷 실명제법의 결과, 가상 세계에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됐다. 주민등록번호도 대량 유출됐다.
그리고 이 실명제법을 없앤 것도 가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였다. 〈미디어 오늘〉이 위헌 청구를 하고, ‘진보넷’ 등 시민사회 단체들이 이를 지원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실명제법이 없어진 결과 가상 세계에 자유가 확장됐다.
인식의 허점
나는 어제 친구의 반응을 듣고 신선했다. 실명제법이 위헌이라는 내 말에 친구는 이렇게 반응했다.
“그게 좋은 거야?”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그건 이제 네이버에 가입할 때 주민번호를 입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해 주자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어차피 가입할 때만 입력하고 숨겨 놓는 거 아냐?”
오프라인 일기장을 누군가에게 맡겨 놓았다면 이렇게 수수방관하지 않을 거다. ‘가상 세계’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 인식에 허점이 생기는 것 같다.
네이버에 있는 나의 이메일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세력은 누구일까? 해커일까? 물론 해킹도 가능하다. 하지만 네이버를 뚫는 해커라면 더 돈이 되는 계정을 노릴 거다. 어노니머스 같은 해커 운동 그룹이 나를 노릴 리도 만무하다. (어노니머스는 저작권 강화 법안에 반대해 미국 법무부를 해킹하거나, 월가 점거 시위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등 정치적 활동을 한 느슨한 해커 그룹이다.)
보안 전문가이자 칼럼니스트인 미코 허마니(Mikko Hermanni)는 인터넷 공격의 세 가지 유형 중 사람들은 두 가지만 범죄로 인식한다고 이야기한다. 두 가지는 돈을 노리는 해커와 어노니머스 같은 해커 운동 그룹이다. 그럼 나머지 세 번째 유형은 무엇일까? 바로 국가다.
미코 허마니는 이집트 국가가 시민들의 통신 내용을 가로챌 목적으로 독일 기업에게서 4억 원짜리 소프트웨어를 구매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집트 혁명으로 밝혀진 내용이다. 국내 기업에 대해선 그럴 필요도 없다. 이명박 정부는 PD수첩 작가의 한메일을 ‘다음(Daum)’의 협조를 얻어 주인처럼 열어 봤다.
오프라인 세계에서 정부가 내 일기를 훔쳐 볼 확률은 극히 낮지만, 인터넷 세계에서 정부는 쉽게 내 사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환상
나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연결되는 방식에 환상이 없다. 가상 세계는 현실 세계 종속적이다. 물론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이다.
그렇다고 가상 세계에서 꽁꽁 숨어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상 세계에서 표현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가져다 준 건 어찌 보면 87년 6월 항쟁이다. 그 전에 대한민국에 표현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래서 난 비교적 안심하고 산다. 정부가 내 이메일을 뒤져 볼 능력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걸 맘껏 시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며, 내 이메일을 뒤져 볼지라도 그걸로 시민적 자유를 제약하는 건 더더욱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보안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이명박 정부가 역사를 상당히 반동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재 시절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 보여 주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이거다. 결국 인터넷의 자유도 현실의 자유가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