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25년:
마침내 기지개를 켠 노동계급의 힘과 전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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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6일 현대중공업에 회장 정주영이 나타났다. 7월 울산 현대그룹 공장들에서 불붙기 시작한 노동자 투쟁과 민주노조 결성을 막으려고 ‘왕회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주영이 관리자들을 모아 놓고 훈시를 하고 있던 회사 체육관에 몰려가 담판을 요구했다. 위력에 눌린 정주영은 노동자 2만여 명이 모인 운동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느 노동자가 정주영에게 흙을 뿌렸다. 정주영이 입버릇처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현장 노동자들의 이런 분노와 투지가 전국 곳곳에서 분출된 이 해 여름, 현대그룹은 물론이고 전국 곳곳에서 군부 독재의 공장 버전인 군대식 현장 통제가 무너졌다. 이 석 달 동안에만 민주노조 1천여 개가 새로 탄생했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더는 천대받는 ‘공돌이·공순이’가 아니었다. 관리자들에게 욕을 먹고도 찍소리 못 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더는 출근 때마다 정문에서 복장과 두발 검사를 받고 머리카락을 잘리는 일을 겪지 않게 됐다. 더는 점심 때 회사가 준 ‘쥐똥이 까만 콩처럼 섞여 있는 도시락’을 억지로 먹지 않게 됐다.
이제 파업과 쟁의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그 결과, 그 해 가을에 노조 설립 요건을 완화하고 법정 노동시간을 4시간 단축하는 등의 노동법 개정을 쟁취했다. 이후 3년 동안 매년 10~30퍼센트에 이르는 임금 인상을 따냈다.
‘쥐똥’
사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독재정권과 기업주 들이 노동자와 민중을 쥐어짠 대가로 성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과 저임금, 군대식 현장 통제, 사회적 천대가 이른바 ‘경제 기적의 시대’에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몫이었다.
독재정권 아래서 노동자들은 자주적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가 쉽지 않았다. 삼성, 현대 등 대기업들은 이런 억압 덕분에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했듯이,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 현대 노동자 계급은 발전한다. …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노동자 계급)들을 생산한다.”
독재정권과 기업주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 노동자들을 억누르고 쥐어짰지만, 그 성장은 더 많은 노동계급을 만들어냈고 도시로, 더 큰 공장으로 밀집시켰다. 박정희 정권 초기만 해도 7백만 명 수준이던 임금 노동자는 1980년대 중반에 1천5백만여 명을 넘어섰다. 이른바 ‘경제 기적’은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거인인 노동계급도 성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87년부터 한국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들이 싸움에 나설 자신감을 갖출 수 있는 배경이 됐다.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이 4·19혁명이나 1980년 ‘민주화의 봄’처럼 군부의 반동으로 역풍을 맞지 않은 것은 마침내 이 거인이 기지개를 켰기 때문이다.
사실 연초부터 6월까지 벌어진 항쟁은 자유주의 야당과 전투적 학생운동, 그리고 여러 사회 집단이 항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국민적’ 투쟁이었다. 당시 6월 항쟁 지도부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대표단에 노동운동 지도자는 5퍼센트도 안 됐다.
1985년 이후 전두환 정권의 강력한 탄압 정책 탓에 노동운동이 위축된 탓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항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참가 비중이 갈수록 늘어났다.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서 지적했듯이, 군부 독재를 패퇴시키며 정치적(절차적) 민주화를 진전시킨 6월 항쟁(정치투쟁)은 노동 대중이 폭넓게 작업장 민주화를 위한 투쟁(경제투쟁)에 나설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남겼다.
마침내 전두환 정권이 한 발 물러서자,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6월 항쟁에 개별적으로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거리의 민주화를 작업장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반면, 6월 항쟁의 일부였던 자유주의 야당들은 노동자 대투쟁과 거리를 뒀다.
군부 독재 아래서도 조금씩 운동과 의식을 발전시켜 온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의 개선 문제를 일회성 투쟁이 아니라 자주적 노동조합 건설로 해결하려 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민주노조 건설 염원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포기할 수 없는 건 그게 아니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 … 그렇게 하면서 나도 노동자라는, 나도 인간이라는 선언을 비로소 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된 일이었다. 무노조 왕국을 선포했던 현대에서 무노조 방벽이 뚫리자, 이후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로 민주노조 결성과 투쟁이 순식간에 퍼져 갔다.
민주노조
현대그룹이 현대중공업에서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 결성을 방해하자, 울산 현대 노동자들은 8월 17일과 18일 연대 파업을 하고 울산 일대를 휘젓는 거대한 행진에 나섰다.
샌드머신 등 중장비를 앞세우고 가족까지 동반한 6만여 명의 행진 앞에서 전투경찰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억눌린 봇물이 터지자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걷잡을 수 없이 발전했다. 7~9월 동안 하루 평균 30건 넘게 파업이 발생했다. 이것이 1970년대 중반 이후 발생한 쟁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는 통계가 있는데, 또 다른 통계로는 1961년 이후 모든 쟁의를 더한 것보다 많다.
울산 현대그룹의 민주노조 결성을 주도했던 지도자 권용목마저 “조합원들이 통제를 벗어날까 봐 두렵다”고 해야 했을 정도였다.
워낙 억압적 조건이라 민주노조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작업장 농성과 파업, 경찰과의 거리 전투 등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투쟁의 전형적 양상은 “선파업 후교섭”이 됐다. 이처럼 노동자 대투쟁의 가장 큰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성과 전투성, 자기 조직화 역량이었다.
대투쟁을 거치며 대기업 제조업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운동의 새로운 주력으로 부상했다.
노동쟁의 참가자의 81퍼센트인 99만 명이 제조업 노동자였다. 특히, 노조가 없는 곳에서 벌어진 쟁의의 90퍼센트가 제조업 부문이었다. 노동운동의 전통이 있던 수도권이 아니라 울산에서 시작해 부산, 마산, 창원, 거제 등 경남의 제조업 공단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했다.
정권은 8월 하순부터 강경 탄압 기조로 돌아섰다. 그 과정에서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가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동계급이라는 거인은 이제 막 잠을 깨 경험이 부족한 탓에 국가 탄압에 맞서 전국적 조직이나 연대 파업을 곧바로 건설하지 못했다. 대투쟁은 9월 중순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는 컸다. 그해 6월에도 군대를 출동시키려다 포기한 전두환 군사 정권은 결국 7~9월의 노동자 투쟁 물결을 보며 반동을 포기한다. 대투쟁이 만들어낸 민주노조운동은 절차적 민주화를 되돌리기 힘들게 만든 진보 운동의 강력한 진지가 됐다.
투쟁의 교훈에서 잘 배운 노동운동은 더디지만, 전진을 계속했다. 이후 2년 만에 노동조합 5천여 곳이 새로 만들어졌고, 90만 명이 새로 노동조합원이 됐다. 전노협 등을 거쳐 1995년에 민주노총을 만들었다. 민주노총은 1996년 말에서 이듬해로 이어진 노동악법·안기부법 반대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해 2004년에는 의회 진출에도 성공했다.
지금 세계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한 정부와 기업주들의 반동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운동이 25년 전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들은 억압적 조건에서도 단결해 싸우는 것이 가능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전투적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노동계급 대중[파업]투쟁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와 개혁의 동력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필요한 것은 전국적 계급 정치였다.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 이런 계급의 기억에서 교훈을 배우며 당면 투쟁에서 정치적 과제를 끌어내야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과제와 조직 건설은 너무나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