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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 교수의 《자본론》 연재 칼럼:
《자본론》에 담긴 혁명적 취지가 빠져 있다

“오늘 ‘자본’을 읽다”라는 강신준 교수의 연재칼럼이 〈경향신문〉에 실리고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세계경제 위기를 설명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이 끔찍한 세상에 대해 의문을 갖고 또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만큼 훌륭한 무기는 없다. 그 점에서 이 칼럼 연재 소식은 반가운 일이었다.

이 연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가 지금까지 쓴 칼럼은 안타깝게도 실망스럽다.

이 칼럼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강신준 교수가 자기 자신의 주장이 마치 마르크스의 주장인 것처럼 왜곡한다는 것이다.

강신준 교수는 먼저 자신은 마르크스와 같은 혁명가가 아니라 개혁주의자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애쓴다. 이것은 그의 자유다. 그런데 자신의 신앙고백을 위해 마르크스를 왜곡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그의 칼럼에서 주장한 수많은 내용들을 낱낱이 반박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의 변증법과 유물론에 대한 조야한 이해와 주장이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본론》 내용으로 논박하겠다.

강신준 교수는 그의 두 번째 칼럼에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사용한 방법론인 변증법을 설명하며 “1+1=2”이고 “1은 성숙해 지며 2”가 되고 “기존의 1을 없애버리면 새롭게 추가하는 1밖에 남지” 않으므로 “도로아미타불의 제자리걸음”이 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강신준 교수가 변증법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그런데 강신준 교수가 칼럼에서 마르크스의 설명이라고 엉뚱하게 인용한 러시아 경제학자 카우프만은 《자본론》의 변증법에 대한 논문에서 “[마르크스와 달리] 종래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법칙을 물리학·화학의 법칙과 동일시함으로써 경제 법칙의 성질을 잘못 이해했다”고 말한다.

사실 물리학·화학에서조차 ‘1+1=2’가 아니다. 방향을 가진 힘 1과 또 다른 힘 1은 방향에 따라 0일 수도 2일 수도 있다. 화학에서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면 생명의 물이 되지만 산소와 탄소가 더해지면 독가스 일산화탄소가 된다.

강신준 교수의 산수는 경제 법칙과 사회 법칙은커녕 물리학과 화학에도 적용될 수 없는 조야한 것으로 변증법이 아니다. 그런데 강신준 교수는 이런 조야한 주장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인용했다. 그러나 이런 선택적 인용은 마르크스가 말한 진정한 취지와 어긋난다.

변증법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 서문의 해당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이제 강신준 교수가 인용한 부분이 이어진다.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문단 마지막은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강신준 교수 같은 이들을 향해 벼락 같은 선언을 하며 끝난다. “일반적 공황은 비록 아직은 그 초기 단계에 있지만 또다시 박두하고 있으며 … 신성 프러시아-독일제국의 졸부들의 머릿속까지 변증법을 새겨 넣을 것이다.”

세 번째 칼럼은 유물론에 관한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유물론이란 “의지를 지배하는 필연의 자연법칙이 인간과 사회라는 유기체에게 적용되고 그래서 사회의 개혁은 이런 필연적 법칙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이후의 경제 체제도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다음에야 성립될 수 있다”며 이전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서문 첫 문장에서 《자본론》이 이전에 발표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계속이라고 밝혔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한 사회구성체는 그 내부에서 발전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에는 멸망하지 않으며, 새로운 보다 높은 생산관계는 그들의 물적 존재 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품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대신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강신준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이어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따라서 인류는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과업만을 제기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과업 자체가 그 해결의 물적 제조건이 이미 주어져 있거나 또는 적어도 생성 과정에 처해 있는 곳에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세계전쟁과 두 번째 경제대공황을 경험하는 지금 우리가 할 일이라곤 사과가 익어가듯 자본주의가 더 충분히 성숙해지기를 기다리는 일인가?

사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당장에 사회주의로 바뀌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성숙’했고, 대중의 삶과 창조적 의욕을 억제할 만큼 노쇠했다. 《자본론》은 혁명을 위한 투사들에게 유용한, 자본주의의 비밀을 파헤치고 분석한 책이다.

강신준 교수와 같이 《자본론》를 개혁주의 시각에서 독해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카우츠키 이후 사민주의자들에 의해 계속돼 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혁주의적 《자본론》 독해는 2007~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이 고양되면서 조중동조차 “마르크스 르네상스”를 운운하고 있는 현재의 정세와 들어맞지 않는다. 시대정신에 한참 뒤떨어진 독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을 왜곡하는 이들을 향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물론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몇 년 전 〈조선일보〉조차 계급투쟁이나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면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서울대 교수를 해도 좋겠다고 썼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 경제학자라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담긴 혁명적 취지는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