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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에타〉:
비애를 넘어, 부활에 대하여

기억 속에서 엄마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든 언제나 내 편이었다. 〈피에타〉는 예수의 시신을 끌어안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절망을 의미한다. 예수가 죽음으로써 퍼뜨린 한 가지 계명이 있다면, “서로 사랑하라”일 것이며,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일 것이다. 바로 엄마처럼.

주인공 강도는 비윤리적인 인간이다. 그는 타자의 절망에 주눅들지 않으며,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 인간의 온기를 느끼는 대신 자신의 베개에 대고 사정을 하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느끼는 사랑들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부채와 책임이다. 절망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람에게 그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죽어버리면 다냐, 이 책임감 없는 새끼”라고 말을 건넨다. ‘병신’이 되어서라도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해주는 보험제도 역시 부채와 책임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자신의 몸을 담보로 비인간적인 부채와 책임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 사회의 가장 낮은 영역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저 높은 빌딩들에서 보기에는 한참 아래쪽에, 누더기 같은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에서 프레스를 찍고 있는 청계천의 금속공들이다. 수많은 산업재해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언제 다쳐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며, 오로지 자신의 몸뚱아리를 교환가치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이 가냘픈 삶에게 부채와 책임이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 칠수록 뼛속으로 파고드는 덫이다.

책임

하지만 이런 삶이 유지되는 동력은 다른 종류의 책임에서 비롯한다. 부채와는 다르게 강요되지 않으며, 타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으로 만들어진 책임. 이 사랑은 종교적이리만큼 무조건적이고, 부채라는 논리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사회는 쥐어짤 게 더 이상 남지 않을 때까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교묘하고도 견고하게 “따뜻한 가족의 사랑”이라는 덫을 쳐 놓았다. 사람들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비논리적인 행동을 하거나, 스스로를 희생한다. 그 결과 아주 끔찍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 척박한 세상을 어떻게든 헤쳐나간다.

강도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이 나타났을 때에야, 강도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는다. 노모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 아들에게 모욕을 주고,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아내 앞에서 남편의 손을 썰어버린 행동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들에게 어떤 절망을 안겨준 것인지에 대해서. 그래서 사랑하는 어머니가 생기자마자, 그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두려워지고 증오를 안게 된다. 혹여 이 사랑의 대상을 잃는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뿌리깊은 절망이다.

사회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채와 책임을 계속해서 덧씌우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절망이 두려워서 배타적으로 서로를 증오한다. 다리를 꺾인 사람은 다리를 꺾여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기에 증오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다리를 잃었기에 증오하며, 다리를 꺾은 사람은 혹여 그 증오가 자신의 사랑으로 날아들까 두려워서 증오한다.

실종된 어머니를 찾기 위해, 이 증오를 만들어낸 당사자에게 찾아가자 당사자는 “돈을 받아오라고 했지, 언제 사람들을 병신 만들라고 했느냐”며, 오히려 강도에게 “인간 백정 새끼”라고 퍼붓는다. 그리고 그는 “다른 놈이 네가 하던 일 더 잘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 “다른 놈”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 같은 분노와 증오에 노출되도록. 이번에도 그는 끔찍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저지르지 않았다.

컨택터스의 대학생 용역들이 “등록금 벌러 가는 거에요”라고 카메라 앞에서 천진하게 말할 때, 사람들은 그들을 비윤리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들은 비윤리적이다. 하지만 인간 백정을 만들어낸 것은 누구였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저 빌딩 숲 위쪽 어딘가에서 슬레이트 지붕들을 굽어살피고 있다.

휴머니즘

어머니를 찾기 위해 간 곳에서, 강도는 자신이 불구로 만든 한 금속공의 나이 어린 아들에게 옆구리를 찔린다. 짧고 작은 연필 끝에 사랑으로 깎아진 날카로운 증오가 서려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증오는 사랑을 타고 끝없이 이어져 내려온다. 우리 모두는 빌딩 위쪽을 볼 정도로는 여유가 없다.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절망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김사과의 장편 소설 〈테러의 시〉에는 아버지에게 팔려 한국으로 온 재중동포 제니가 마약에 취해 환각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그 환각 속에서 ‘휴머니즘’을 본다.

천장도, 바닥도, 싱크대도, 프라이팬도, 프라이팬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스파게티 또한 휴머니즘으로 충만하다. 제니가 썩은 스파게티를 한입 가득 넣고 씹는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의 맛. 휴머니즘 그 자체. 휴머니즘의 핵심.

그것은 몹시 역겹다.

쓰다. 썩은 냄새가 난다. 정말이지 구역질이 난다.

제니는 양손으로 쓰레기통을 잡은 채 토한다. 프라이팬에 가득한 휴머니즘을 쓰레기통에 쏟아 버린 다음 한 손에 수세미를 들고 팬에 세제를 가득 부어 거품을 낸다. 물을 틀자 더러운 거품과 함께 휴머니즘이 깨끗이 씻겨 내려간다. 남은 것은 텅 비고 깨끗한 팬이다. 제니는 휴머니즘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깨끗하게 빛나는 팬을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아름답다.

휴머니즘이야말로 자본주의 시대의 빛나는 이데올로기다. 우리는 가족애에서 휴머니즘을 느끼고, 인간을 사랑하는 데에 지고의 진리가 있다고 배운다. 그 휴머니즘 속에 어떤 절망이 숨어있는지, 그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를 미워해야 하는지 까지는 인지하지 않는다. 이 아름답고 빛나는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썩은 내를 풍긴다.

영화 〈피에타〉에서 이 소름돋는 “사랑의 덫”을 빠져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딱 한 순간, 복수를 결심한 인간은 원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 원수 역시 “불쌍”하기 때문에.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는 죽었고, 죄를 씻기 위해서 작품 속의 인간들도 죽었다. 영화관 밖에 있는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고민한다. 이 휴머니즘을 넘어서서 그곳에 다시 한 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휴머니즘이 있을까.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휴머니즘이. 그래서 이 세상은 절망하는 마리아 앞에 부활한 몸으로 서서, 다시 한번 사랑한다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우리는 부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