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을 추모하며: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던 역사가
〈노동자 연대〉 구독
10월 1일에 타계한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홉스봄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최근 그는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의 독일 생활에 관한 생생한 회고록을 집필했다. 그때 이미 공산주의자가 된 홉스봄은 침대 밑에 등사기를 숨겨 놓고 지냈다고 한다.
홉스봄 일가는 이후 영국으로 이주했고(그의 아버지는 영국인이었다) 젊은 홉스봄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후 평생 영국에서 살았지만 청소년기의 이주 경험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홉스봄은 자신의 난민 시절을 회고하면서 “아직도 나는 나를 받아 줄 가장 가까운 나라로 당장 출국할 수 있을 정도의 현금과 유효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약간 불편하다”고 썼다.
그는 또 1970년대 인도·파키스탄계 케냐 난민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영국 이민국 관리들을 보면서 [이민 문제를 – 옮긴이] 주로 평등과 추상적 시민권의 문제로 바라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고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1947년부터 홉스봄은 런던 버벡 대학(Birbeck College)에 재직했다. 학자로서 그는 크게 성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서와 논문을 여러 편 썼다.
홉스봄은 자신이 연구하는 ‘시대’에 파묻힌 채 인류사의 나머지 시기에 대해서는 무지한(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더 무지한) 상투적인 역사학자가 결코 아니었다.
17세기 봉건 사회에서부터 페루의 토지 점거와 19세기 초 유럽의 비밀 결사까지 넘나드는 그의 연구 범위는 실로 엄청나다.
그의 4대 저서인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는 바스티유 함락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를 망라한다. 누구든 그의 4부작을 읽으면 값진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홉스봄은 단 한 번도 역사를 역사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학술적 저서와 논문 못지않게 수많은 대중적 글을 〈가디언〉, 〈뉴 스테이츠먼〉, 〈런던 리뷰 오브 북스〉 등의 매체에 기고했다.
많은 유명 역사가들과 달리 홉스봄은 학자로서의 지위를 악용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벌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데 역사가 도움이 된다고 믿었고, 따라서 역사에 근거한 주장들이 역사학도만이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청중에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홉스봄은 역사학자 이외에 다른 인격도 있었다. 미국 문화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불신 당하던 시절에 그는 재즈 평론가로서 프랜시스 뉴튼이라는 가명으로 〈뉴 스테이츠먼〉에 글을 썼다. 그러나 홉스봄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홉스봄 또한 로큰롤 음악에는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평생 공산주의자로서 살다 간 에릭 홉스봄은 1936년에 영국 공산당에 가입해 당이 해체된 1991년까지 당적을 유지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우파들은 이 점을 이용해 그의 연구 업적을 깎아내리려 했다.
2008년 보수당 대회에서 마이클 고브(현 영국 교육부 장관)는 “홉스봄이 사악한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온 지난 세월을 눈물로 참회하지 않는 이상 그의 말은 전혀 들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전혀 들을 가치가 없다는 말은 마이클 고브 자신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말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유치한 비방은 간단히 무시해도 된다. 그러나 홉스봄에게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주의의 문제
홉스봄의 공산주의 신념과 마르크스에 대한 존경심은 대체로 그의 연구에서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홉스봄이 사회의 경제적 토대와 계급 관계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덕분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버전의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부작용도 낳았다.
일찍이 파시즘을 경험한 그는, 노동운동과 친자본주의 정당들 간의 동맹을 뜻하는 ‘민중전선’만이 파시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런데 1930년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바로 이 전략 때문에 혁명적 잠재력이 억눌리고 파시즘의 승리를 향한 길이 열렸다. 그럼에도 홉스봄은 평생 민중전선 전략에 집착했다.
때로 이 점은 그의 연구 성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노동계급의 투쟁성이 최고점에 달한 사건들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자본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의 가장 위대한 성취로 손꼽았던 1871년 파리코뮌을 고작 몇 문단으로 깎아내린다.
1956년에 홉스봄은 러시아가 헝가리 혁명을 짓밟은 것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지했다. E P 톰슨과 크리스토퍼 힐 등 영국 공산당의 유명한 역사가들 중 다수가 이 사건을 계기로 탈당했지만 홉스봄은 잔류했다.
2006년에도 그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 지면에서 크리스 하먼(2009년에 작고한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과 나와 논쟁하면서 헝가리 노동자 평의회가 헝가리 혁명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헝가리 혁명 참가자들과 목격자들 다수의 증언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1960년대에 홉스봄은 새로운 운동의 부상에 잠시 감명받은 듯했다. 피터 빈스와 타리크 알리 등 신좌파가 옥스퍼드에서 조직한 최초의 베트남 전쟁 반대 강연에 연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1968년에 그는 혁명적 신문인 〈블랙 드워프〉에 글을 썼다. 그는 프랑스 총파업을 “경이롭고 매혹적”이라고 묘사했고 프랑스 공산당이 “굼뜨게 움직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자신의 본래 성향으로 되돌아갔다.
홉스봄의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 개입은 1978년에 행한 ‘노동운동의 중단된 전진’이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다. 여기서 그는 전투적 산업 투쟁이 사회주의와 별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경제주의적 노동조합 의식은 때로 노동자들의 연대를 자아내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서로 반목시킬 수 있다”고 그는 썼다.
그로부터 4년 뒤 홉스봄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구실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을 드러내 놓고 비판했다. “전통적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의 중심 기반이었던 육체 노동자 계급은 이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축소되고 있다.
“이 계급은 1939년의 고소득자들조차 꿈꾸지 못했을 정도로 생활수준이 개선되는 과정에서 변화를 겪었고 어느 정도는 분열되기도 했다.
“이제 더는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적 상황 때문에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의식이 발전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없다. 비록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는 있지만 말이다.”
홉스봄은 새로운 노동계급의 출현을 보지 못한 채 “노동계급”을 역사의 특정 시기에 국한된 개념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의 주장은 결국 공산당의 몰락을 부른, ‘유로코뮤니스트’로 알려진 노골적 개혁주의자들과 강경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홉스봄의 견해는 공산주의 운동 진영을 훨씬 뛰어넘어 영향력을 미쳤다. 1982년 영국 노동당 대회에서 당 지도자였던 닐 키녹은 “현존하는 가장 현명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며 홉스봄을 찬양했다. 산업 투쟁에 반대하는 그의 주장이 노동당을 우경화시키려던 키녹의 의도에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말년의 홉스봄은 러시아식 ‘사회주의’에 갈수록 비판적인 입장이 돼 갔다. 《극단의 시대》에서 그는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좋게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홉스봄은 비록 자본주의의 해악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감은 없었던 듯하다. 2007년에 열린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 회의에서 그는 인류가 역사의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홉스봄은 애초에 그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던 저항 정신만큼은 결코 잃은 적이 없다. 점잖은 학술적 어법에 연연하기에는 너무 연로해진 그는 2008년에 향후 영국사에서 민족주의가 득세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역사의 임무는 결국 민족주의적 신화에 똥침을 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홉스봄의 연구 업적에는 비판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의 연구의 다른 많은 부분은 앞으로도 마이클 고브 같은 자들에게 통렬한 “똥침”을 날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