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혁명 승리의 길: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선 계급적 단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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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9일, 이집트 군대가 소수 종교인 콥트교(이집트 토착 기독교) 신도를 지지하는 시위대를 공격했다. 이 마스페로 학살 때문에 27명이 죽었다(관련기사는 〈레프트21〉 66호를 보시오). 이집트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RS)의 사메 나기브가 학살 1년을 맞아 학살 추도 연설을 하며 이집트 혁명의 과제를 다룬다.
이집트 혁명은 험난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몇몇 부패한 인물들이 제거되고 선출된 사람들이 뽑혔으니 이제 다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 중 하나인 이집트 혁명의 초입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혁명 과정에서 한때 2천만 명이 거리 시위에 참가했는데, 역사상 사람들이 이처럼 대규모로 참가한 혁명은 아주 드물다.
혁명은 시위에 참가한 많은 이들에게 평등과 정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줬다. 이러한 의식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일은 오직 혁명에 맞먹을 만큼 거대한 패배를 겪어야만 일어난다. 혁명이 패배하려면 반(反)혁명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이집트에서는 그만큼 커다란 반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아직 반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반혁명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집트 국가 기구는 여전히 호스니 무바라크 시절 그대로다. 모든 기구는 차별과 종단 간 갈등, 부패와 착취 위에 지어졌다.
육군 원수 탄타위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전직 군정보부 수장을 앉힌 것도 군부를 전혀 바꾸지 못했다. 군부는 이전과 똑같이 권력과 경제 이권을 손안에 쥐고 있다.
이집트 혁명은 대중과 노동자들이 핵심적 구실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혁명이지만 기독교인, 누비인, 시나이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다. 혁명이 불어넣은 자신감 때문에, 그동안 억압받고 짓밟혔던 모든 이들이 행동에 나섰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느낀 것이다.
사람들이 혁명 초창기의 경험을 순식간에 잊을 리가 없다. 혁명을 새롭게 하거나 2차 이집트 혁명이 나타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 틀린 까닭이다.
사회정의
지난 두 달 동안 1천4백80건의 파업이 벌어졌다. 혁명 이후 가장 큰 파업 물결이다. 이집트 대중은 여전히 혁명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들은 사회정의와 존엄한 삶을 여전히 원하며 행동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그럼에도 종단적 정서가 왜 커지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우선 무바라크가 신자유주의 경제·사회 정책을 도입하면서 필수 공공서비스를 모두 사유화했다.
그 결과 평범한 사람들은 의료와 교육을 어디에서 구해야 했는가? 기독교인은 교회에 가야 했고, 무슬림은 모스크에 가야 했다. 그곳에서만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함께 공공서비스를 누렸던 사람들이 ‘우리’와 ‘저들’로 철저하게 나뉘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기대서 살아야 했다.
이런 일은 당연하게도 사회 최상층에 매우 유리했다.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에는 10억 달러[1조 원] 이상의 재산 소유자가 4백90명이나 됐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도 있고 무슬림도 있다. 이들은 [현직 대통령] 모하메드 무르시 하에서도 여전히 억만장자로 남아 있다. 동시에 이집트 인구의 45퍼센트는 빈곤층 이하로 생활한다. 이 사람들 역시 기독교인과 무슬림이다. 이처럼 빈곤은 어느 종교를 갖고 있느냐와 무관하다.
어느 혁명이든, 사회정의를 말하면서도 이런 종류의 계급 모순을 안고 있다면 진정으로 완결된 혁명이 아니다. 이제 갓 시작된 혁명일 뿐이다.
이집트 혁명은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는 일을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이들의 해방은 사회정의의 필수적 요소다. 여성이 평등을 쟁취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한 평등을 누릴 수 없다. 콥트인과 누비인, 지금 이 순간 공중 폭격을 당하고 있는 시나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혁명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약한 고리
마스페로 학살이 벌어진 까닭도 이 때문이다. 반혁명은 항상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 반혁명은 1백만 명이 운집한 타흐리르 광장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인 1만 명이 행진하는 것은 공격할 수 있었다. 이집트 군부는 콥트인이 군대를 공격했다고 떠벌리며 종단 간 갈등을 부추겼다. 일부 살라피주의자들이 이에 호응해서 시위 중인 기독교인을 구타했다.
역사상 모든 혁명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진다. 유대인이 소수이면 유대인들이 공격받았고, 아르메니아인이 소수이면 아르메니아인들이 공격받았다. 왜 그러한가? 일부 대중이 국가가 아니라 기독교인이 문제라는 식의 후진적 의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반혁명은 이 점을 파고든다.
한마디로 우리는 과도기를 지나고 있고, 이집트 혁명의 둘째 국면을 준비하고 있다. 구체제를 되살리려고 하는 반혁명 세력도 여전히 권력과 돈을 쥐고 있고 대중을 동원할 수 있다. 이처럼 양쪽 모두 준비 중이다.
어떤 혁명도 억압 받는 이들이 해방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사회정의를 이룬 다음에 여성이나 콥트인의 권리를 생각해 보자”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청년 콥트인들은 이집트 혁명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 왔다. 그들이 없다면 혁명은 완수될 수 없다.
종교에 따라 사람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반혁명 세력의 무기다. 우리가 계급을 단결시키지 못한다면, 저들은 이 무기를 우리를 향해 휘두를 것이다. 파업과 타흐리르 광장 시위를 교회와 모스크 방화, 종단 간 충돌로 대체할 것이다.
사회 해방과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은 중요하게 연결돼 있다. 무슬림과 기독교인, 여성과 남성이 함께 파업에 참여하고 있다. 사장들은 첫 대응으로 종단 간 갈등을 일으키거나 여성은 애초 일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을 퍼뜨린다. 그들은 우리 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우리는 혁명가로서 이에 분명히 반대해야 한다.
무슬림 노동자는 기독교인에 대한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에 참여하는 계급을 단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여성 억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폭력
반혁명은 다양한 형태를 갖는다. 성폭력과 살라피주의자는 동전의 양면이다. 살라피주의 설교사가 남편이 아내를 구타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여성 혐오는 거리에서 성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은 여성이 거리 또는 작업장에 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조차 싫어한다.
기독교인은 모두 부자라거나 그들이 나라를 강탈했다는 식의 다른 반동적 생각들도 있다. 여성이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종류의 반동적 생각은 문맹률이 높은 나라에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접할 통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슬람주의 운동을 단일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많은 기독교인이 자신들에 반대해 이슬람주의자들이 똘똘 뭉쳤다고 결론 내리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다. 무슬림형제단 소속 사람들이 최근에 벌어진 상당수의 파업을 이끌었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은 그 파업을 아주 강력하게 탄압했다. 버스 노동자 파업을 이끈 셰이크 타렉은 살라피주의자다. 그는 지난 대선 때 무르시 표를 7천 명 조직했다. 무슬림형제단이 자신 같은 사람을 대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급 분단은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주의자 안에도 존재한다. 그들은 단일하지 않다.
무슬림형제단의 청년들이 새로운 대안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좌파를 대안으로 택하게 해야 하고, 좌파는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슬람 혐오증이 국제적으로 몰아치는 것 역시 이집트 콥트인들에게 영향을 준다. 이슬람 혐오증은 오늘날 유럽 지배자들과 미국 제국주의의 기본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사회의 온갖 문제를 소수의 무슬림 탓으로 돌린다.
청년 콥트인은 이슬람 혐오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해야 한다. 그들은 유럽에 가길 원하지만, 유럽에서 사람들은 그의 피부색을 보며 그를 무슬림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슬람 혐오다. 우리가 모든 형태의 종교적 차별에 반대하고 연대해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