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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학생의 가슴에 붉은 줄을 긋게 만드는 무정한 체제에 분노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는 언제나 표정이 어두워서 걱정되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 녀석은 수업 시간에 책을 보는 일도 없이 거의 항상 책상에 앉아 화장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녀석이 갑자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맘에도 그게 기뻐서 수업이 끝나고 필기한 걸 도와준 적도 있습니다. 잠깐 그런 것이 아닐까 염려했는데 꽤 오랫동안 꾸준하게 열심히 수업을 듣는 모습이었습니다.

어제는 시험 기간이라 그 녀석 반의 시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 시험에서 녀석이 제가 가르치는 과목뿐 아니라 다른 과목도 끝까지 풀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뻤습니다. 이 녀석이 제 과목을 공부하는 모습을 넘어서 무언가 자신의 삶에 의욕을 가지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가르치는 과목 시험을 채점하면서 이 녀석의 답지를 봤습니다. 선생님들이 서술형 답란을 채점할 때는 꼭 그런 답지가 있습니다. 분명 무언가 알고 있는데 그래서 선생님의 마음은 정말 정답으로 인정해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어려운 오답. 예를 들어서 ‘아래 시의 주제를 상징하는 핵심적인 한 단어를 쓰라’ 하고 물었고 답은 ‘장미’인데, ‘시에서 꽃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아마 아름다움이 핵심이 아닐까요?’ 이런 식의 답이죠. 이런 답은 분명히 정답의 조건은 채우지 못했지만, 학생이 지금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칼자국

이 학생이 바로 그런 답을 썼습니다. 저는 이걸 맞게 할지 틀리게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 시험 체제가 강요하는 ‘정답 아니면 오답’이란 무게에 눌려서 학생의 발전 가능성에 칼자국을 내듯 붉은 줄을 그어 놓았습니다. 슬퍼하면서.

저는 이 체제의 교사를 하기엔 너무 예민한 것인지, 학생들의 점수보다 그 발전 가능성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험 때마다 이렇게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과자라도 들고 이 학생을 따로 만날 생각입니다. 그리곤 요즘 공부를 열심히 했던 모습이 기뻤다고, 차마 너의 노력을 담은 답에 무정하게 붉은 줄을 긋기는 싫었다고 다독여 주기라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이 자본주의의 무정한 교육을 바꾸기 위해서 더 열심히 활동해야겠다고 다시금 저를 다잡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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