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꿰매도 아물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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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가끔 병원에서 진료할 기회가 있다. 토요일 소규모 작업장들이 늘어선 서울 성동구의 자그만 병원에 있다 보면 이 땅에 소외받은 자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많은 질환과 긴 처방일로 채워진 처방전을 가질수록 소외 정도가 큰 자들이다.
겨우 주말 점심시간을 할애해 올 수밖에 없고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니 온갖 종류의 약을 최대한 길게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 그들은 다름 아닌 이주노동자들이다.
유해 환경에 얼마나 노출됐던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호흡곤란과 피부 질환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답답한 소리인 줄 알지만 “이렇게 죽어 가려고 한국에 온 거냐”며 화를 내게 된다. “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받는 부문은 언제나 자본주의의 가장 추악한 얼굴을 보여 준다”는 작고한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말은 청진기와 설압자를 통해 명확하게 입증된다.
자그만 개인 병원에서 조처할 수 없을 만큼 다쳐서 오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마르크스가 말한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란 것이 이런 것일까? 오히려 안쓰러워 인상을 찌푸리는 것은 나고 당사자는 태연하다. 자포자기한듯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호한 미소를 띄우며 그냥 꿰매 달란다. 그들이라고 왜 아프지 않겠는가? 그들이라고 그 떨어져 나간 살점에 어찌 눈물짓지 않겠는가? 여기서 안 꿰매 주면 돈 없어서 큰 병원 못 가니까 제발 다시 일할 수 있을 만큼만 어떻게 해 달라는 그 말을 삼키고 내게 짓는 그 모호한 미소. 그 미소에 난 결국 응답할 수밖에 없다.
중간관리자나 사장과 함께 오는 경우는 더욱 가관이다. “야, 압둘라야, 괜찮지? 그래 괜찮아. 선생님, 얘 그냥 일하다 좀 다친 거 같은데 어차피 뼈는 안 다친 거 같으니까 대충 꿰매 주세요.” 자기 핸드폰을 떨어뜨려도 그거보다는 안타까워할 것 같다. “당신은 나가 있어요!” 고함을 지르고 이주노동자와 함께 한숨을 쉬며 호흡을 맞추게 된다. 소외, 착취, 계급 적대는 보이지 않는 먼 개념이 아니라 이처럼 아프도록 구체적인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