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6월 항쟁에서 ‘군부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쟁취’ 구호가 주를 이뤘지만, ‘민중정부 수립’, ‘제헌의회 소집’, ‘임시혁명정부 수립’ 등의 구호도 있었다. 그러한 구호들은 새로운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NL-PD(ND) 논쟁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한 편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 편에 CA(제헌의회)그룹을 필두로 한 ‘맑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인 세력이 있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반공주의 기치 아래 말살됐던, 사회주의 사상이 파쇼적 폭압 정치를 자양분으로 자라났다. 여기에 19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은,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지를 일깨워 주며, 새롭게 퍼지기 시작한 사상의 밑거름이 됐다.
한편 1987년은 소련의 붕괴가 시작된 원년이기도 하다. 소련은 1991년 말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중국도 껍질만 남은 사회주의를 폐기하고 자본주의로 전환한다. 소련과 중국을 현실 사회주의라고 믿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충격적 경험이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념의 혼돈은 사회주의자들의 이합집산을 낳았다. 자본주의 체제에 무릎 꿇어버린 자들도 줄을 이었다(제헌의회그룹 출신 김성식 전 한나라당 의원, ‘강철서신’ 저자인 김영환 등을 보라).
하지만 이들이 받아들인 맑스-레닌주의에는 애초에 함정이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맑스-레닌주의에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가득찬 쓰레기들을 버무려 놓았는데, 그것이 그대로 수입돼 소련과 중국과 북한이 이상적인 사회인 것처럼 미화됐다. 그것은 아편이었다. 스탈린주의는 “국제 노동운동의 아편 노릇을 했다.”
스탈린주의는 당을 계급 위에 올려 놓았다. 스탈린주의는 계획을 통한 관료 지령 경제를 노동자 민주주의 경제 위에 올려놓았다. 사회주의는 관료 계획경제와 같은 말이 됐고, 일당 독재가 됐고,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됐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일당 독재나 관료가 지령하는 계획경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성립된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는 1928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변질됐다. “관료층이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빨리 완수하겠다는 주관적 의도를 가지고 내디딘 첫걸음이 국가자본주의 건설의 토대가 되는 역설적 현상을 가져왔다.”
우리 나라에서 1987년 이후 부활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은 1991년 소련 몰락과 함께 동반 침몰하다시피 했고, 혼돈을 거듭했는데,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그러한 혼돈에 종지부를 찍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을 해나가는 데 훌륭한 지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