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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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유래했다.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의 투표권과 노조 결성권을 요구하며 맨하탄의 동쪽 심장부에 있는 루트거스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주로 뉴욕에 있는 의류 산업의 초착취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뉴욕에는 5백여 개의 의류 공장이 있었는데 노동 조건은 최악이었다. 그 곳에서 일했던 한 여성은 당시 노동 조건을 이렇게 회상했다.
“다 부서져 가는 위험한 계단 … 창문은 거의 없고 있는 건 그나마 더럽고 … 마루는 일 년에 한 번 청소할까 말까 하고 … 밤낮으로 타고 있는 가스등 외에 다른 불빛은 아무 것도 없고 … 화장실은 캄캄하고 더럽고 악취가 나고, 깨끗한 마실 물은 한 잔도 없고 … 쥐와 바퀴벌레가 득실거리고 …
“겨울 몇 개월 동안 추위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또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고통받았죠. … 이렇게 병을 유발시킬 것 같은 굴 속 같은 작업장에서 어린 아이들까지도 주당 칠팔십 시간 일했죠! 토요일이나 일요일까지 포함해서! … 토요일 오후가 되면 이런 공고가 나붙습니다. ‘일요일에 출근하지 않는 사람은 월요일에도 출근할 필요가 없다.’ … 아이들의 휴일에 대한 꿈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우리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결국 우리는 아이들에 불과했기 때문이죠.”1)
여성 노동자들은 온 가족이 한 방을 쓰는 혼잡한 셋집에서 힘겹게 살았다. 사장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그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실과 바늘에도 돈을 청구했고 심지어 작업용 의자에도 요금을 매겼다.
마침내 여성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여성산업노조연맹(WTUL)은 열악한 노동 조건에 맞서 싸울 것을 약속했고 다음해 의류 산업 전체에서 노조 가입이 폭발적으로 증대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1909년 13주 동안의 파업 ― ‘2만 인의 반란’으로 알려진 ― 에서 절정에 올랐다. 이것은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노조 건설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한 파업 참가자에 따르면, 파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방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나와 유니온 광장을 향해 갔습니다. 때는 11월이라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습니다. 우리에겐 추위를 막을 털코트 하나 없었지만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를 계속 이끌어 준 강인한 정신이 있었습니다.
“나는 대부분이 여성인 젊은이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배고픔이나 추위, 고독 등 무슨 일이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특별한 날에 아무 것도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은 그들의 날이었습니다.”2)
파업에 참여한 여성들의 전투성은 아주 유명했다. 많은 파업자들이 10대였고 일부는 10살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깡말랐고 일부는 굶주려 몹시 허약했다. 그러나 그들은 추운 겨울 내내 흙먼지와 눈보라를 맞으며 피켓 라인에 서 있었다. 그들은 경찰의 구타와 폭행으로 온몸이 멍들고 피를 흘리면서도 파업을 사수했다.
그 파업을 묘사한 것으로 ‘2만 인의 반란’이라는 노래가 전해져 온다.
1909년 겨울의 암흑 속에서
우리가 피켓 라인에 서서 추위에 떨고 피흘릴 때
우리는 세상에 보여줬네 여성들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떨쳐 일어나 여성의 힘을 쟁취했네.
만세! 1909년의 블라우스 제조공들
피켓 라인에 서서
지배자들의 권력을 분쇄하고
갈 길을 제시하고 사슬을 끊으며.
우리는 1909년에 함께 싸웠던 남성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네
우리 어깨 걸고 헤쳐 나가자
국제숙녀복노조(ILGWU)의 지도를 받으며.
파업 노동자들은 국제적 명성을 획득했다.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여성 노동자들은 여성의 평등을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됐다.
독일의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은 1910년 제2인터내셔널 국제노동여성회의에서 해마다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할 것을 제안했고 1911년부터 경축되기 시작했다.
세계 여성의 날의 슬로건은 ‘보통 선거권’이었다. 당시 보통 선거권 문제는 논쟁거리였다. 많은 페미니스트 조직들이 제한된 선거권 ― 부자 여성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 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보통 선거권을 쟁취하는 것은 더욱 현실적인 문제가 됐다.
세계 여성의 날의 목적은 보통 선거권과 여성의 평등과 연관된 다른 쟁점들로 캠페인을 하고 국제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여성의 위치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1915년까지 매년 유럽 주요 도시들에서 시위가 조직됐고 전쟁이 발발해 시위가 금지당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세계 여성의 날이 1917년 러시아에서 경축됐다. 1917년 3월 8일(러시아 구력으로 2월 23일)에 벌어진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는 위대한 2월 혁명을 촉발했다.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과 함께 “억압받는 사람들의 축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혁명을 통해 여성 해방의 가장 커다란 장을 열었다.
혁명의 결과,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됐고 이혼이 완전 자유화됐다. 여성의 일할 권리가 법제화됐고 동등한 임금이 지급됐으며 전면적인 유급 출산 휴가제가 도입됐다. 공동 식당, 공동 세탁소, 탁아소, 유치원 등 그 동안 여성을 짓눌러 왔던 가사 노동을 사회가 책임지는 조치들이 시행됐다.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조차 도달하지 못한 것이었다.
비극이게도 스탈린이 혁명의 성과를 분쇄하면서 여성 해방의 잠재력 역시 파괴됐다. 그러나 지난 세기 가장 위대했던 여성 해방 투쟁은 오늘날까지 영감을 주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 시위에 동참하자
평등을 위한 투쟁의 날로서 세계 여성의 날이 갖는 의미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의 삶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고 여성의 지위 또한 개선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적 불평등은 우리 사회의 커다란 특징이다.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주입되는 성차별적 교육,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풍토,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구직부터 승진과 임금(남성의 58퍼센트) 등에서 차별을 받고 모성 보호를 무시하는 작업 조건 속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나라 여성 노동자의 대다수(전체의 70퍼센트)가 근로기준법 적용이 안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이 때문에 법적으로 보장된 유급 출산 휴가와 생리 휴가 등 모성보호 조항이 대다수 여성들에게 휴지조각이 되고 있다.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육아가 개별 가정에 떠넘겨져 여성에게 굴레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김대중은 여성부를 신설하고 저명한 여성운동가를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산전산후휴가 90일 확대 등을 담은 ‘모성보호입법안’이 전경련과 자민련의 반발에 밀려 국회 통과가 좌절돼 여성활동가들은 벌써 실망감을 맛보고 있다.
‘여성 업종’인 보험설계사, 캐디, 텔레마케터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사장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좌초되고 있다. 2000년 여성 관련 예산은 일반회계에서 0.28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김대중 정부는 대다수 여성의 부담을 덜어주기는커녕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계속 추진해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공격하고 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 임금 하락, 노동 조건 후퇴, 사회 복지 축소 등을 낳는 시장 정책은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더 나은 노동 조건과 모성 보호를 내건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에 모두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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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워드 진, 《미국 민중 저항사 2》, 일월서각, 1986년, 40쪽.
2) 같은 책,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