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와 2012대선:
노건투 비판에 대한 재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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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끝난 후에 노건투(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 유진 동지가 ‘문재인 지지투표방침의 약점 – 다함께의 반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기사에서 내 글(“혁명가와 2012 대선 ― '노건투'의 비판에 답하며”)을 비판했다.
대선이 끝나고 뒤늦은 비판이지만 답변을 해야 할 것 같다. 국제노동계급 투쟁의 역사뿐 아니라 박근혜가 당선한 상황에서 중요한 전술 문제(개혁주의 정당에 대한 태도, 민주당에 대한 태도)를 담고 있어서 그렇다.
주장과 실천의 모순
유진 동지 지적처럼, 레닌은 《좌파 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에서 영국공산당한테 영국 노동당이 출마한 선거구에서는 출마하지 말고 노동당에 투표하라고 조언했다. 노동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삼가지 않으면서 영국 보수당과 자유당에 맞서 비판적으로 투표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인용한 것은 어떤 정치세력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더라도 비판적으로 투표할 수 있다는 레닌의 전술을 소개하는 맥락에서였다.
유진 동지는 이런 전술의 “기본 조건 중 하나는 노동당이 비록 혁명정당은 아니지만 노동자계급에 기반을 둔 노동자당(부르주아적 노동자당,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라는 점”이었다고 지적한다. 문재인에게 투표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비판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유진 동지는 레닌의 병기고에서 무기를 잘못 꺼내 들었다. 만약, 유진 동지의 주장이 일관성이 있으려면, 노건투는 이번 대선 지지 후보 명단에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도 올려 놨어야 한다. 어차피 사퇴할 후보라는 반박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노건투는 “노동자계급에 기반을 둔 노동자당(부르주아적 노동자당,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을 그동안 선거에서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이번 대선과 함께 치른 서울시 교육감이나 경남도지사 선거에 대한 입장도 없었다. 노동자연대다함께를 비판하려고 꺼내든 무기가 결국 자신의 발등을 찍게 된 셈이다.
1996~97년 민주노총 대중파업의 성과로 부르주아 정당에게서 독립적인 노동자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선진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1997년 대선, 2002년 대선, 2007년 대선에서는 당연히 권영길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옳았고 노동자연대다함께는 바로 이런 입장을 취했다(이번 대선 전술은 여기서 다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반면 부르주아에 맞서 “개량주의에 물든 노동자당”도 지지해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을 가지고 노동자연대다함께를 비판하고 있는 노건투는 창립 이후 이런 입장을 취한 바가 없다.
대선 직전에 나온 노건투의 글을 보면 개혁주의 정당에 대한 혼란으로 가득하다. 예컨대 최이선 동지는 “통합진보당은 노동자혁명의 길 대신 의회주의적 집권노선이라는 개량주의의 길을 선택했다”(2012.12.12)고 규탄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그 전신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한 진보신당 등 개혁주의 정당들이 그런 노선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 당들이 혁명정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또 유진 동지는 “자본가계급 편에 서 있는 후보들과, 노동자계급 편에 서 있는 후보들로 나뉜” 이번 대선에서 “두 명의 노동자 후보”(2012.12.12)밖에 없었다고 썼다. 통합진보당 후보를 사실상 자본가계급 편으로 구분한 것이다. 레닌은 바로 이런 태도를 “유아적 혼란”이라며 가차없이 비판했다. 레닌은 영국 노동당 지도자들이 “가망 없는 반동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가혹하게 비판하면서도, 선거에서는 이들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런데 어리둥절하게도 2주 만에 나온 이번 글에서 노건투는 “개량주의에 물든 노동자당과 민주당 같은 자본가정당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다”며 노동자연대다함께를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떤 단체와 세력을 분석할 때, 그들의 주장뿐 아니라 실천을 봐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유물론자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볼 때 노건투는 주장도 일관성이 없는데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동안 노건투의 실천과도 모순되는 비판을 나에게 하고 있다.
타협에 대해
유진 동지는 “다함께는 이 전술적 타협[‘노건투’가 한 번도 실천하지 않았던] 즉, ‘노동자계급 내의 개량정당에 대한 타협’의 문제를 ‘자본가 정당’(민주당)에 대한 타협’의 문제로 슬쩍 ‘치환’한다”고 비판한다. 이 주장을 하려고 앞에서 내가 비판한, 자신들의 실천과 모순된 견해를 내놓은 것 같다.
즉 ‘레닌은 개량정당과 타협하라고 했지 자본가 정당과 타협하라고 한 적 없다. 따라서 다함께는 더 이상 레닌을 들먹이지 마라’는 것이다. 우선 노건투가 레닌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레닌은 《좌파 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에서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던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타협이 영국노동당과 같은 개혁주의 정당이나 “반동적” 노동조합에 대한 타협만을 뜻하지는 않았다.
레닌은 독일과 맺었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타협의 한 사례로 들었다. “라데크와 부하린 동지는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했다. 그들에게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원칙상 용서될 수 없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 해악을 끼치는 제국주의자들과의 타협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제국주의자들과의 타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불가피한(had to be made) 타협이었던 것이다.”(강조는 원문)
혁명을 지키느냐 마느냐 문제에서 러시아 혁명가들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차례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처음에 소수파였던 레닌의 “불가피한 타협”이 지지를 얻었다.
이뿐만 아니다. 레닌은 “짜르 체제가 붕괴되기 전에 러시아의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의 도움을 여러 차례 이용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수많은 타협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레닌은 “불가피한 타협”과 “불필요한 타협”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원칙상’ 타협을 거부하는 것, 어떤 것이든 타협 일반의 허용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 그것은 진지하게 고려하기조차 어려운 어리석은 짓이다. … 타협에는 별의별 게 다 있다. 우리는 개개의 타협 또는 각양각색의 타협의 상황과 구체적인 조건들을 분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강도들이 가할 수 있는 피해를 줄이고 그들을 체포, 처형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돈과 총을 강도들에게 넘겨준 사람과, 약탈물을 나눠 갖기 위해 돈과 총을 강도들에게 넘겨준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레닌은 혁명적 원칙을 지키면서도 전술적 유연함을 잃지 않았던 혁명가였다.
러시아의 경험
반면, 유진 동지는 노동자연대다함께 운영위원회가 내놓은 대선 평가 성명서에 실린 “진보진영은 불가피한 특정 상황에서 민주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미리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견해를 비판한다.
(정확한 원문은 “진보진영은 불가피한 특정 상황에서 민주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민주당과는 다른 진보적 정치 대안 구축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이다)
“부르주아 혁명 시대에나 그런대로 봐줄 만 했던 자본가정당과의 연대 관점을 21세기 한국에서 꺼내드는 건 완전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며 말이다.
유진 동지는 그러면서 러시아 혁명을 근거로 든다. 1917년 2월 혁명 이전까지는 “레닌과 볼셰비키도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일시적 협력을 고려”했지만 그 이후에는 “자본가 세력에게 어떤 신뢰도, 어떤 지지도 보내지 않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1917년 2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고, 1917년 10월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보는 듯한 단계혁명론 관점 비판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유진 동지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다.
앞서 언급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것은 심지어 자유주의 부르주아와의 타협도 아니었다. 레닌이 언급했듯이 “제국주의 강도”와 타협이었다) 체결은 1917년 10월 혁명 이후다.
1917년 8월(구력), 혁명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코르닐로프 쿠데타 때도 볼셰비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볼셰비키가 “자본가 정부”라고 규정했던)를 비판적으로 방어했다. 어떤 정치적 지지도 보내지 않으면서도 코르닐로프에 맞서 혁명을 지키기 위해 군사적으로 방어한 것이다.
유진 동지의 추상적 접근이라면 케렌스키나 코르닐로프나 ‘다를 게 없다’. 따라서 둘이 싸울 때 혁명가들은 손 놓고 구경하면 된다. 그러나 레닌과 볼셰비키는 그러지 않았다.
유진 동지가 레닌의 “4월 테제”에서 한 주장을 인용하며 노동자연대다함께를 비판하는 것도 번지수가 틀렸다. 레닌이 혁명기에 소비에트에 대한 부르주아의 영향력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일상적 시기 부르주아 선거에서 투표 전술과 등치시키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노동자 권력의 맹아다. 그러나 대선은 자본주의 국가 수장을 뽑는 일이다. 그리고 계급 투쟁의 수준과 노동계급 조직 정도를 간과한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레닌이 인용했던 체르니셰프스키 말대로 “혁명은 [일직선으로 뻗은] 네프스키 간선도로같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구체적 전술을 고민하고 내놓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하에서 벌어질 운동과 투쟁에 민주당이 발을 내밀려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미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쌍용차 농성장과 현대차 비정규직 농성장,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기웃거리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 단체들의 태도를 보면 극단적인 두 견해로 나뉜다. 민주당에 대한 무비판적인 지지와 민주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
그러나 둘 다 옳지 않다. 이것이 불필요한 것인지, “불가피한 특정 상황”인지를 냉철하게 따져 보고, 불가피하다면 타협을 고려할 수도 있다. 물론 “불가피성”을 미덕으로 격상하지 말고, 민주당에 대한 비판을 삼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불가피한 특정 상황”조차 내팽개쳐 버리는 것은 결국, 부르주아한테 운동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그들의 영향력만 확대하게 하는 어리석은 태도라는 게 레닌이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꽁무니주의”
유진 동지는 이런 불가피한 타협조차 “대중의 경험과 결과를 지워버리고, 노동자의 의식을 ‘끌어내리는’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다함께를 “꽁무니주의”라고 비판한다. 문재인에게 투표하는 것은 ‘후진 노동자’고, 김소연·김순자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선진 노동자’라는 스스로 그려놓은 도식에 따라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레닌이 “꽁무니 좇기”를 비판했을 때는 더 큰 함의가 있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을 돌아보며 “계급 전체나 거의 전체가 자본주의 하에서 한 번이라도 계급의 전위, 즉 계급의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의 의식 수준과 활동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멘셰비키의 ‘꽁무니 좇기’를 비판했던 것이다.
멘셰비키는 당과 계급을 동일시했다. 이에 반해 레닌은 계급의 일부인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로만 이뤄진 사회변혁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런 사회변혁조직을 건설하려고 분투하고 있는 노동자연대다함께를 “꽁무니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투표는 전술의 문제다. 원칙의 문제가 아니다. 즉, 당이 어떻게 계급과 접촉하고 연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런 접촉을 통해 사회주의자는 대중과 연계를 맺고 함께 행동하면서 ‘문재인에게 어떠한 환상도 가지면 안 된다. 진정한 변화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쓰디쓴 진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 노건투는 문재인에게 투표하겠다는 노동자들과 거리를 두고서는 ‘식초와 담즙’부터 뿌리려고 한다. 과연 그러한 추상적 선전만으로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심지어 유진 동지는 “외관상 두 명의 노동자 후보[김소연·김순자 후보]가 세워졌지만, 어느 쪽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적 전망을 온전하게 담아내지는 못[했다]”고 비판한다. 대선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추상적 선전을 더 많이 해야 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구체적 정세 속에서 광범한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선거 전술에 대한 인식을 찾기 힘들다.
지난번 비판 글에서도 밝혔듯이, 이런 정치 전술 문제에선 기꺼이 동지적 관점에서 논쟁과 비판을 마다하지 않지만, 작업장 투쟁에서는 노건투의 전투적 활동가들과 협력하며 함께 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진정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은 투표장이 아니라 거리와 작업장이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은 그 한복판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작업장이든, 거리든, 게다가 혁명가들이 머릿속에 그리던 상황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전술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