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아사드는 갈수록 궁지에 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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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5일부터 본격화한 시리아 민중의 저항이 22개월 넘게 계속되고 있다. 목숨을 잃은 사람만 6만 명이 넘는다. 레바논, 요르단, 터키로 피신한 최소 60만 명(유엔 집계)의 난민들도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왜 시리아는 3~4주 만에 독재자를 무너뜨린 이집트, 튀니지와 다르게 전개됐는가?
최근 〈한겨레〉는 한 기사에서, 시리아가 이집트와 달리 제국주의에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시리아 지배자들은 이집트 등의 지배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정책과 태도를 취해 왔다. 무바라크가 30년 동안 대규모 사유화를 단행하고 각종 보조금을 폐지하며 양극화를 키웠듯이 아사드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2000년에 집권한 아사드는 사유화와 시장 개방을 단행하고, 각종 보조금과 가격 통제 정책을 없앴다. 그 결과 실업률이 치솟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감소했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혁명이 벌어지자 시리아에서도 저항이 시작됐다.
두 나라의 대외정책도 본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둘 다 1990년대 초 걸프전에서 군대를 보내 미국을 지원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2000년대에는 두 나라 모두 CIA가 ‘테러범’을 체포·고문하는 데 협력했다. 다만 이집트가 협조의 대가로 미국한테 크게 보상받은 반면, 시리아는 위와 같은 은밀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미국한테 인정받지 못했다.
이집트에서 혁명이 좀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던 이유는 노동계급의 조직과 힘에서 찾아야 한다.
노동운동
2000년 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2차 인티파다)은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을 자극했고, 이는 다시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2006년 마할라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이 다른 부문으로 확산되며 이집트 노동운동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7년에는 임금을 3백25퍼센트나 끌어올린 파업에 힘입어, 민주노조(‘독립노조’)가 결성했다. 그리고 무바라크 퇴진 운동이 한창이던 2011년 2월 초 수에즈운하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곳곳으로 파업이 확산됐고 사흘 만에 무바라크는 사임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는 혁명 발발 후 대도시에서 노동자 파업이 벌어지기까지 5개월이 걸렸다.
시리아에는 3백만에 이르는 노동자가 있고 대부분이 6대 도시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1980년대 초에 하마 학살(2만 명 사망) 등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은 이후 아직 충분히 힘을 회복하지 못해 왔다.
아사드 정부는 뒤로는 미국에 협조하면서도 겉으로는 반미·반이스라엘을 표방하며 국내 저항세력 탄압을 정당화했다. 계급 분단선을 밝히는 노동운동이 약했던 까닭에 아사드는 종파 간 분열도 이용할 수 있었다.
또 이집트에서 군부 등 지배계급의 일부가 무바라크에 등을 돌렸지만 시리아에서는 주요 자본가들이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것도 아사드 정부가 오래 버티는 데 일조하고 있다.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입도 혁명을 뒤틀리게 하는 구실만 하고 있다. 아사드는 이것을 이용해 자신이 마치 반제국주의를 위해 버티는 양 포장하고 있다.
그 결과, 아사드 일가와 거의 일체화 돼 있는 시리아 군부는 쉽게 분열하진 않고 있다.
이처럼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됐지만 시리아 민중은 종파 간 갈등으로 빠져들지 않고, 서방의 개입을 거부하면서도 정부군을 무너뜨리고 있다. 도시 노동계급의 투쟁도 서서히 성장하고 있다. 이런 경이로움 속에서 어떤 대안 세력이 창출될지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