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들은 SNS를 어떻게 봐야 할까?
〈노동자 연대〉 구독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언제나 사회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곤 했다.
특히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방송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은 인터넷 매체의 등장은 선전·선동의 기회에 목말라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다. 최근 가장 유력한 인터넷 매체로 자리잡은 SNS(트위터, 페이스북 등)도 이런 기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지난 대선 전에도 이 나라 진보·개혁 진영의 많은 사람들과 지식인들이 SNS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과장했다. 아랍 혁명에서 SNS가 한 구실도 종종 과장돼 왔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인터넷 같은 기술 발전을 간단히 무시해 버리거나 활용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겠지만 결코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SNS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기중심 커뮤니티”(한국언론학회, 《한국사회의 정치적 소통과 SNS》)라고 할 수 있다. ‘친구맺기’라는 말이 보여 주듯 기존의 인터넷 매체들에 비해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고 각각의 사용자가 그 공동체의 중심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SNS를 잘 활용하려면 가상과 실제의 차이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활동과 연결지어 보자면 어떤 일들을 하는 데 SNS를 보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먼저 〈레프트21〉에 실린 기사나 읽어 볼 만한 글들을 내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토론회나 포럼을 홍보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광고를 보고 토론회에 참가한 뒤 우리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단체에 가입한 사람도 있다.
페이스북 같은 곳에 글을 쓰는 것은 〈레프트21〉 같은 신문에 기고하는 것보다 조금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으므로 연습 삼아 자신의 주장을 짤막하게 정리해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레프트21〉 편집자와 기자들은 이런 글들을 보고 독자편지를 보내 달라고 의뢰하기도 한다. 물론 직접 신문에 기고해 주면 훨씬 좋을 것이다. 페이스북 담벼락보다는 〈레프트21〉 신문과 웹사이트가 훨씬 더 영향력이 있다.
페이스북을 일기장처럼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럴 때조차 좋은 일기가 있다. 힘나는 얘기들을 쓰고 서로 격려와 칭찬, 고무하는 일기는 서로에게 좋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활용이 지속되려면 사용하는 사람 자신의 목적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인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기장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대상과 메시지의 내용이 모호하게 될 위험을 늘 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결국 SNS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의 성격과 한계를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SNS와 운동
SNS를 잘못 활용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 인터넷 같은 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인상적으로 과대평가하는 데서 비롯한다.
물론 언론의 자유가 제약돼 있거나 다른 이유로 표현의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운동을 건설하려 할 때 SNS 같은 매체는 일정한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첫째, 투쟁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거나 심지어 혁명적 상황에 돌입하면 SNS의 중요성은 오히려 줄어든다.
“[2011년] 1월 25일 이집트 정권은 불만을 가라앉히려고 국가 인터넷망 전체를 마비시켰다. 그러나 시위가 승승장구하면서 이런 시도는 정권이 원하는 효과를 내지 못했다.
“단체들이 ‘한창 시위 와중에 트위터와 문자메시지로 정보를 교환하고 계획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규모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방식은 소규모 직접 행동의 경우에는 괜찮겠지만, 수십만 명이 행진하거나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에 돌입하는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조니 존스, 《마르크스21》 10호)
둘째, 온라인 매체가 오프라인 신문에 비해 더 효과적인 선전·선동 수단이라는 생각은 일상적인 시기에조차 사실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한편에서는 단지 사회주의자들에게 충분한 발언 기회만 주어지면 수많은 노동 대중이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선전과 선동을 조직이라는 문제를 분리해 사고한 결과다.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이 일상적 시기에 광범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단지 우리 신문이 모든 집마다 배달되고 있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노동자들은 생애 대부분 동안은 자본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인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노동자들을 투쟁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간다. 그런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사상들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노동계급 내에는 두 종류의 사상이 공존한다. 한편에는 지배계급의 사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투쟁 속에서 발전한 사상들이 있다. 이러한 사상들은 노동계급 전체에 불균등하게 퍼져 있다. 지배계급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수가 있는가 하면 본능적으로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소수가 있다. 대부분은 자본주의적 사상도 일부 수용하고 반자본주의적 사상도 일부 수용한다.
이런 반자본주의적 사상들이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오로지 투쟁을 경험할 때만이다. 얼핏 보기에 지배계급의 사상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던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단결과 연대와 호혜주의를 얘기하고, 당면한 투쟁에서 승리할 힘뿐 아니라 세상을 바꿀 힘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자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 집단에 이런 자각이 균등하게 체화돼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선전·선동의 무기가 얼마나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는 이런 투쟁에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모든 투쟁은 그 발전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어떤 전술이 더 효과적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투쟁을 전진시킬 효과적인 전술을 제시하고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려면 단지 느슨한 개인들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잘 조직된 적들이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데다가 투쟁에 나서기 전까지 노동자들이 받아들이던 사상들이 투쟁에 계속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노동자들의 혁명 조직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런 관점 즉, 운동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을 건설해야 하는 과제에 비추어 보면 SNS는 더욱 부차적인 수단이 된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앞서 말한 구실을 하려면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원리에 따라 조직돼야 한다. 즉 민주적인 토론이 충분히 이뤄져야 하고 이를 기초로 행동통일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응집력을 갖춰야 한다.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러려면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 수단 즉, 직접 마주보고 토론하는 과정을 돕는 매체를 선택해야 한다.
“〈소셜리스트 워커〉 덕분에 우리는 매주 수천 명의 다른 활동가들과 대화할 수 있다. 〈소셜리스트 워커〉의 장점 중 하나는 그것이 단지 가상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시간과 장소(특정 지역이나 작업장, 피켓라인, 집회)에서 판매되고, 얼굴을 마주 보며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질적 생산물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른 활동가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자신과 더 광범한 투쟁이 모두 강화될 수 있다.”(알렉스 캘리니코스, 〈소셜리스트 워커〉 2233호)
그래서 레닌은 “신문은 집단적 선전가이자 집단적 선동가일 뿐 아니라 집단적 조직자다. 이 점에서 그것은 건물을 세울 때 짓는 비계에 비유할 수 있다” 하고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발행하는 신문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방송하는 팟캐스트나, 구체적 조건이나 의식 수준을 알 수 없는 온라인 청중에게 전달되는 페이스북 메시지와는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반면 ‘자기중심의 폐쇄적 온라인 네트워크’인 SNS에서 담벼락에 올리는 메시지가 ‘친구’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판단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다.
“근래에는 정보의 결핍보다 과잉이 문제이듯,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을 더욱 염려해야 한다. 자기를 팔로우하고 있는, 또는 자기가 팔로잉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진짜 정체성을 알고 있는지,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 친구의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새로 연결된 친구의 친구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들의 한 마디 말이 그 사람을 얼마나 잘 나타낸다고 믿는지 하는 내용들이 모두 중요하다.”(나은영,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소셜 미디어’)
셋째, SNS를 특정한 목적으로 활용할 때조차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장 흔한 오류는 SNS만 보다가 현실 인식이 흐려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간지는 안 보면서 SNS는 온종일 끼고 사는 듯한데, 이처럼 “SNS 의존도가 높은 사람들은 SNS의 현실 대표성을 더 높게 지각한다.”
그러나 SNS는 다른 온라인 공간에 비해 ‘유유상종’ 가능성이 훨씬 크다. 친구를 직접 선택하므로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일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서도 “트위터에서 … 비슷한 사람들을 유의미하게 더 많이 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페이스북의 경우는 … ‘끼리끼리 커뮤니케이션’ 양상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페이스북에서 일부 급진 좌파 활동가들과 친구를 많이 맺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난번 대선에서 박근혜가 되든 문재인이 되든 별 상관이 없다는 식의 일면적 주장을 자주 접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아니다.
이럴 때 진실을 알고 싶다면 더 광범한 노동자들의 실제 정서를 알아보려 해야 한다. 노동계급 선진 부위의 정서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단순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 일간지도 읽어야 하고 다른 활동가들과 토론해 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 봐야 한다.
다른 오류는 앞서 지적한 온라인 의사소통 문제와 연관된 것인데 짤막하게 쓰인 문장들만 보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SNS는 다른 온라인 매체와 마찬가지로 참가자 수가 늘어날수록 중요한 토론처럼 보이는데다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기 쉽다.
그러면 그 사건을 잘 알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이 사건의 전체 그림에는 별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지엽말단적인 것을 붙들고 늘어지거나 ‘다 좋은데 이런 것은 문제 아니냐’ 하며 꼬투리를 잡기 쉽다.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뒤에 효과적인 대응이 뭔지 함께 고민하려는 동지적 태도가 아니라, 전체적 맥락도 모른 채 누구의 이런 의견은 옳고 이건 틀렸다는 식으로 팔짱 끼고 훈수 두려는 개인주의적 태도가 발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독자들에게는 거의 해당하지 않을 텐데 예브게니 모로조프가 ‘게으른 활동’이라고 부른 문제다. 모로조프는 “웹2.0 예찬론은 ‘게으른 활동’ 방식의 캠페인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그저 페이스북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 준다” 하고 지적한다.
SNS 상의 ‘관계’도 웹 상의 ‘활동’처럼 그 실제 효과는 무척 약한데 SNS를 통한 관계는 ‘약한 유대’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는 급진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데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
그에 비하면 현실에서 활동가들이나 동료들이 맺고 있는 ‘강한 유대’는 실제로 여러 대중 운동에서 투쟁을 성장시키고 유지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다.
개인용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SNS를 사용하는 환경이 대개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때 혼자 사용하는 것이다보니 SNS 사용이 사용자를 개인주의적 관점으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2. 온라인 의사소통
SNS를 잘못 활용하는 또 다른 사례는 온라인 의사소통이 가진 약점을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본능에 따른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하려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데, 내 생각에 아마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할 듯하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는 유전자 결정론이나 사회생물학처럼 근본에서 환원주의적 가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법으로는 인간의 의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하는 다양한 연구들 중에는 흥미로운 것들도 있다.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연구들인데 실험을 해 보니 사람들을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몇 초~몇 분) 마주보게 했는데도 그 사이에 1천 개가 넘는 정보를 얻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실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감각을 통해 정보를 얻는데다 기억 덕분에 그런 정보들을 다양한 형태로 가공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에 비춰 보면 온라인 의사소통은 대체로 짤막한 문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기껏해야 몇 가지 이미지를 활용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실제 의사소통에 비해 훨씬 비효율적이다.
컴퓨터와 통신망을 이용한 인터넷 토론에서는 현실 세계의 토론에서 가끔 생겨나는 문제들이 훨씬 자주 극단적으로 생겨난다. 익명성이 낳는 여러 문제는 그 일부일 뿐이다.
문자로만 이뤄지는 인터넷 토론과 달리 현실에서 사람들은 ‘다중 채널’을 통해 의사소통한다. 눈빛·말투·몸짓 등 입체적으로 전달되는 정보[와 경험·기억]는 ‘소리’로 전달되는 정보를 명확히 하고 불필요한 오해와 과장을 걸러내는 작용을 한다.
의사소통은 기본적으로 개인이든 대중이든 상대방을 전제로 한 것이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토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인식은 불필요한 불신이나 적대감을 없애거나 혹은 그 반대 작용을 하는데 인터넷 토론에서 상대방을 인식할 수 있는 정보는 대체로 그가 한 ‘말’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아주 표면적으로 드러난 특성을 중심으로 상대를 파악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군과 적군으로만 파악한다거나 ‘초딩’, ‘중딩’ 하는 식으로 싸잡아 이해하는 것이다.”
필요 없는 권위와 전문성도 있지만, 토론의 발전에 꼭 필요한 권위와 전문성도 있다.
토론에서 신뢰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 토론에서는 토론을 발전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 ‘누가’,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어렵다. 의견 교환의 시공간적 제약을 완화한 대가로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일부 잃어버린 것이다.
‘편안함’은 효율적이라거나 편리하다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통해 훨씬 효과적인 정보 획득 방법을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불편하다. 이런 행동은 스스로 경쟁에서 뒤처져 있음을 상기시킨다.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거는 것 자체가 무척 부담스럽다.
자본주의 사회가 뒤틀어 놓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편안한’(얼굴을 마주할 필요도, 여러 가지 난처한 환경에 놓일 필요도 없는) 대화 방식을 선택하는 듯하다.
효율성으로 보자면 정보 습득은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게 빠르고 신뢰도도 높다. 의견 교환도 문자만 있는 것보다는 전화가 낫고 대면 접촉이 훨씬 효율적이다. 중요한 정보 획득 과정, 논의 과정은 대개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다.
( 장호종, 《마르크스21》 2호)
예컨대 당장 실제 현실에서 1백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진지하게 토론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야! 이 바보들아!’ 하고는 나가버린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실제 사람들 사이의 접촉은 이런 불필요한 경계나 과도한 반응을 걸러주게 마련이다. 내가 토론에 필요한 권위와 전문성이 있다고 한 까닭이다.
그런데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온라인 상의 토론이 삼천포로 빠지거나 불필요하고 지엽적인 논쟁을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
또, SNS만 보고 있으면 분명히 협력과 숙고가 필요한 문제가 벌어졌을 때조차 손이 먼저 나가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SNS의 장점으로 여겨지는 신속함이 낳는 약점이다.
예를 들어 트위터에서 대부분의 리플과 리트윗은 1시간 내에 벌어진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바꿔 말하면 1시간 내에 반응을 얻지 못한 글은 잊혀진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이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신속한 대응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문제를 1시간 내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지르겠는가.
이런 특성들 때문에 SNS를 포함해 온라인 공간에서는 누구를 공격하고 비난하기는 쉬워도 이를 방어하기는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진정한 힘이나 영향력 같은 것은 쉽게 무시된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간혹 누군가가 SNS 상에서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게 됐을 때도 당사자나 그 동료들이 SNS 상에서 진실을 규명하려 하는 시도가 부질없게 되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럴 때에는 과연 온라인 상에서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혹은 불가피한지, 아니면 현실 세계에서 대응하는 것이 나은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모든 전장을 고를 수는 없지만 어떤 것들은 명백히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SNS의 환상에 빠져 있어서는 이런 고민을 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일대일 대화와 다수를 상대로 한 대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 사람들을 조직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알 수 있다 – SNS 상에서 대화에 집중하다보면 종종 그 사실을 잊기 쉽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신이 태어날 환경을 선택할 수는 없어도 그 환경을 바꿔가는 존재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SNS에 중독된 사회주의자는 자신이 고른 환경에서도 그 환경에 노예가 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3. SNS와 조직 내 민주주의
일부 독자들은 SNS를 활용해 조직 안팎의 문제들을 토론하는 것이 조직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신중하게 토론해야 할 문제들을 모임에서는 얘기하지 않다가 페이스북 같은 곳에 툭 하고 던져놓는 일들도 벌어진다.
그러나 온라인 의사소통이 가진 약점은 앞서 설명한 대로다.
또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식의 토론이 더 민주적이라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다.
근본에서 민주주의는 한 배를 탄 사람들 사이의 의사결정 수단 즉,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의 운영원리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어떤 전술이 더 효과적인지를 두고 개혁주의자들과 토론해 다수결로 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또 노동계급 의식이 불균등하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조직 내에도 어느 정도 그런 불균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 의식을 이데올로기나, 이론, 지식 같은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계급 의식은 단지 이런 것들로 환원할 수 없고, 투지나 결의, 사기 같은 것들이 훨씬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불균등성을 고려하면 조직 내에서조차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별 관계가 없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라고 해서 조직 내 민주주의가 훼손될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존 몰리뉴는 사회주의 조직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래와 같이 말했다.
[사회주의] 조직이 관료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나? 물론 완전히 보장할 수 없다. 혁명이 승리할 보장이 있나? 파업이나 시위가 성공할 보장이 있나? 마찬가지 문제다.
아나키스트들은 내적인 권력욕이나 레닌주의 조직의 권위주의적 유산 때문[에 공산당과 사민당 지도부가 타락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전자가 문제라면 아나키즘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 후자 즉, 권위주의적 타락은 레닌주의 정당뿐 아니라 모든 노동자 조직에게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나코-신티칼리스트 조직까지 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다르게 설명한다. 관료적 타락의 위험은 노동자 조직이 태어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해지는 다양한 압력 때문에 생겨난다.
한편에서 착취와 억압 그리고 노동 소외가 평범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지도자들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자신감과 의식을 갖는 것을 방해한다. 다른 한편에서 자본주의는 그 본성상 지도자들에게 부패한 영향력을 끼친다.
이런 분석은 볼셰비즘에서 스탈린주의로의 타락을 설명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첫째 노동계급 자체가 분쇄 당했다. 내전과 기아, 전염병과 경제 붕괴가 건강하고 민주적인 노동자 통제를 무너뜨렸다. 지도자들의 관료주의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이 관료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압력(경쟁적 자본 축적의 압력)이 작용했다. 그 결과 국가자본주의로 변화했다.
노동조합 상근관료층이나 노동당 의원들에게도 다른 환경이지만 똑같은 압력이 작용한다.
혁명적 조직이 이런 타락에서 벗어나려면 네 가지 수단이 필수적이다.
1) 당은 노동대중의 매일의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압력에 반작용을 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반면교사로 삼자면 개혁주의 정당은 주로 노동계급의 수동성에 기반을 둔다.
2) 당은 혁명적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이는 명망을 쫓는 인자들이나 그 정치적 배경이 되는 조작에 순응하는 인자들을 제거할 것이다.
3) 당내 역할이나 지위에 따른 물질적 특권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당의 구조와 규칙은 민주주의(정책을 둘러싼 충분한 토론과 논쟁, 지도력에 대한 선거와 책임)와 중앙집중주의(다수결에 따른 행동통일)를 따라야 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중앙집중주의나 규율을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통제 메커니즘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혁명 정당에 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장치이다. 비민주적 중앙집중주의 조직의 리더들이 당의 정책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개인주의적으로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조직에서는 조직의 리더들이 당의 정책을 이행하게 하는 원리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당이 계급 투쟁과 맺는 실제의 관계이다. 어떤 구조적 특징이 당의 부패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아나키스트들은 당을 거부함으로써, 특히 레닌주의 당을 거부함으로써 노동 계급을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무장해제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John Molyneux, 《Anarchism – A Marxist Criticism》)
사회주의자들은 ‘연장’ 탓을 하기보다 ‘장인’이 돼야 한다. 체제가 낳은 결과들뿐 아니라 체제 자체에 맞서 싸우는 투사들이 돼야 한다. 자본주의에 맞선 행동과 의식은 우리의 사기와 자신감을 높여 자본주의적 타락 압력에 맞서는 해독제가 될 것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조직 내에서 필요한 논의를 툭 하니 던져 놓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을 물어뜯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 일부 종파주의자들(또는 분파주의자들)이나 사냥개처럼 탄압의 구실을 찾는 경찰에게나 쓸모 있는 일이다. 일이 벌어진 뒤에 ‘난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하는 무책임한 태도도 독자들 사이의 신뢰만 갉아먹을 뿐이다.
“한국에서 특히 싸이월드에 열광했던 특성이 지금은 페이스북으로 옮겨 간 상태로 보인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트위터보다는 약간 더 폐쇄적인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싸이월드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이며 따라서 개인의 정보가 개인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아직은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인 듯하다.”(나은영,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소셜 미디어’)
예브게니 모로조프는 ‘왜 KGB는 당신이 페이스북에 가입하길 바라는가?’ 하는 글에서 SNS의 무분별한 활용이 국가의 인터넷 감시를 돕는다고 지적했다.
SNS는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공간이 아니다.
4. SNS와 일기장
어떤 독자들에게 SNS는 그저 일기장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아무하고도 친구를 맺지 않고(그러면 알 수도 없겠지만) 쓰는 것이라면 할 얘기가 없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지만 하지 못할 때 마음속에 담아두는 수단으로 일기장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듯 페이스북도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어느 정도는 이해할만한 현상이다.
누구에게나 주변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가 모르는 사람들의 지지보다 큰 만족감을 준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한 말에 누군가가(특정인일 수도 있고 다수일 수도 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떠보는 용도로 페이스북을 쓰기도 하는 듯하다.
문제는 그럴 때 반쯤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누구와 친구를 맺고 있는지 잊는다는 것이다. 경찰도 보고, 중앙집중적 사회주의 조직에 반감을 보이는 다른 활동가들도 보고 있고, 옛 친구도 보고 동지들도 보는 곳에 “우울하다”, “하루 종일 잠만 잤다” 하고 한마디 남기면 도대체 어쩌라는 건가?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SNS를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길 기대하는 것은 완전한 착각인데다 그런 친절한 동료가 있더라도 위로받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쓴 글에 누가 ‘좋아요’를 누른다고 혹은 내가 누가 쓴 글에 ‘좋아요’를 누른다고 관계가 좋아지는 게 아니다. 모기 물린 자리를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듯 피상적인 관계는 상처를 곪게 하는 경우도 많다.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정보든 관계든 ‘너무 적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된다. 대규모의 피상적 대인관계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SNS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의 압력을 느끼는 현재 상황은 ‘지속적인 주의분산’과 ‘관계의 과부하’를 가져온다.”(김은미 등, 2011)
“오프라인 친구 수는 많을수록 정보통제성·자기효능감뿐만 아니라 일반 신뢰가 증가한 반면, 페이스북 친구 수는 오히려 적을수록 정보통제성과 자기효능감이 크고 그에 따라 온라인 신뢰도 높게 나타났다.”(나은영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전화를 걸어라. 그리고 호프집이든 찻집이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환경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아요’ 누르기보다 천 배 낫다.
5. 결론
새로운 매체와 기술이 등장했을 때마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매체가 혁명적 조직 건설이라는 고도로 의식적인 노력을 대신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곤 했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데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느라 주의가 분산돼 정작 신문 같은 핵심적인 수단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실제로 겪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곰곰히 따져보면 어떤 첨단 기술이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기술적 수단은 자본가들과 공안기관들은 물론이고 우리와 전혀 다른 전략과 전망을 가진 운동 내 다양한 경향의 활동가들도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의 노동자들은 아예 파업 돌입과 함께 노동조합 게시판을 폐쇄하기도 한다.
- 불가피하지 않다면 SNS를 이용한 토론과 논쟁으로 현실의 토론과 논쟁을 대체하려 하지 말자. 불가피할 때조차 앞서 언급한 주의사항들을 꼭 염두에 두고 현실세계로 나오려 해야 한다. 신선한 바깥 공기 한모금에 끝을 모르고 지리멸렬하게 계속되던 논쟁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 SNS 활용은 면대면 접촉을 통한 조직을 대체할 수 없고 핵심적인 조직 수단이 될 수도 없다. 혁명적 신문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나서’ 조직하고 모임에서 토론하고 전화를 이용하고 문자메시지를 사용하고 SNS는 그 다음이다.
- 개인적인 푸념이나 불필요한 조직 내부 정보를 꺼내놓지 말자. SNS ‘친구’들을 비효율적인 논쟁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 오해와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정보기관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할 거라면 더 효과적인 수단을 쓰자. ‘좋아요’가 관계를 유지하거나 개선하지 못한다.
- 내 친구가 누구인지 점검하자. 그룹을 분리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 〈레프트21〉에 편지 쓰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페북 친구보다는 동지들을 믿는 게 현명하다.
-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레프트21〉의 기고자이자 판매자로서 SNS를 부차적인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한번씩 하고 ‘로그 인’하자.
[참고] SNS가 기존 인터넷 게시판과 다른 점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싸이월드(미니홈피)가 지배하던 SNS(Social Network Service,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라고 불렸다)가 스마트폰을 이용한 모바일 인터넷 시장의 성장과 함께 크게 달라졌다.
싸이월드가 자유게시판 중심으로 운영되던 기존 웹사이트의 참여 공간과 다른 중요한 특징은 ‘폐쇄성’이었다.
웹사이트(ws.or.kr을 떠올리면 된다)에서, 인터넷 카페, 블로그까지 진화한 인터넷 매체의 게시판은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이었던 반면 싸이월드는 ‘일촌’을 맺은 사람들끼리만 볼 수 있는 훨씬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싸이월드에서는 사용자 자신이 인적 관계망의 결절점 구실을 하는데(적어도 자기가 보기엔) 바로 이 점이 사회에서는 그렇게 여겨지지 못하는 많은 청년에게 큰 매력을 준 듯하다.
참가자가 누구인지 대강이나마 알 수 있고(대개 이미 알던 사람과 일촌을 맺는다) 덕분에 자유게시판을 통한 의사소통의 단점을 일부 보완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반면 이런 폐쇄성은 애초 온라인 세계의 장점으로 여겨지던 확장성을 가로막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네트워크의 성장 속도는 더뎌지고 대체로 현실 세계에서 내가 맺는 관계들이 바뀔 때에야(이사, 입학, 취직, 가입 등) 새로운 관계들이 만들어지곤 했다.
폐쇄성도 계속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싸이월드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일촌’도 늘어났는데(현실에서의 관계 때문에 거부하기 쉽지 않다) 이들과의 관계가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보니 즉, 누구와는 연인이고 누구와는 직장 동료이거나 학교 친구이고, 누구와는 선후배 사이이다 보니 관계를 확대할수록 나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의 성격이 모호해지고 점차 표현이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오늘날 많은 청년이 이런 인터넷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SNS가 빠른 속도로 수입된 데에는 스마트폰의 보급도 영향을 끼쳤지만 이런 “자기중심 커뮤니티”(한국언론학회, 《한국사회의 정치적 소통과 SNS》)는 월 순접속자수가 2천5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익숙한 인터넷 환경이었다. 오히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부터 다른 나라에서 크게 성장하던 페이스북이 국내 시장에서는 싸이월드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내 기업들의 방해로 한국 통신 시장에 스마트폰 보급이 오랫동안 지연되면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스마트폰 보급과 맞물려 빠르게 성장한 페이스북은 지금은 싸이월드 사용자들을 대거 흡수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듯하다.
페이스북은 싸이월드보다는 개방적이고 트위터보다는 폐쇄적인 SNS다.
그런데 모바일 네트워크와 결합한 SNS는 이전에 인터넷 의사소통에서 나타난 모순 중 한 가지를 더욱 심화시켰다.
인터넷 의사소통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는 것은 신속함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성이다. ‘쌍방향 소통’이라는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그 신속함에 대한 찬사다. 어떤 종류의 매체에서든 쌍방향 소통은 이뤄진다. 그게 얼마나 빨리 또는 얼마나 폭넓게 이뤄지는지가 다를 뿐이다.
그런데 대체로, 신속함은 필요할 때 언제나 그런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매우 단순한 사건·사실에 관한 글일 때나 그렇다.
글이 조금만 길어지거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사태는 순식간에 달라진다. 분 단위로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을 읽고, 신속하게 판단해 자기도 그런 토론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 과도한 신속함이 오히려 개방성을 침해하게 된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는 트위터가 조금씩 인기를 잃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