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표절, 어떻게 봐야 할까?’에 대한 여러 독자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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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혜 씨가 쓴 ‘표절, 어떻게 봐야 할까?’ 에 대한 여러 독자들의 의견을 모아 싣는다.
글 순서
* ‘표절, 어떻게 봐야 할까?’ 를 읽고 (서범진)
* ‘지적재산권’도 문제지만 ‘표절’도 문제다? (장호종)
* ‘원저작자’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박연오)
* 표절은 잘못이지만 인격권 무시가 핵심은 아니다 (최용찬)
‘표절, 어떻게 봐야 할까?’ 를 읽고
서범진
이아혜 씨가 기고한 "표절, 어떻게 봐야 할까?" 독자편지 글을 잘 읽었다. 요즘 개인적으로 석사 논문 작성에 고생을 하고 있는데, 요즘 같이 자고 일어나면 "논문 표절 시비"가 불거져 나올 때는 무척 허탈감이 크다. 일부 특권 인사들은 자신과 사회의 지적 성장을 위해 글을 쓰고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권을 강화하려는 수단이나 하나의 경력 악세사리로 삼기 위해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는다. 한편, 또 다른 한 구석에서 자본은 타인의 연구에 돈을 대줬다는 대가로 그 연구를 자신들의 배타적 배불리기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양 편의 모습 모두 꼴 사납고 사회에 해악적이긴 마찬가지다.
후자의 측면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아혜 씨가 기사에서 언급한 지적 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순수한' 창작물이란 없"다는 말은 정말 올바른 지적이다. 우리 모두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지적 성과물 위에서 새로운 성과물을 만들어 나간다. 최근에 논의되는 "지적재산권" 강화 흐름은 있는 사람들의 배를 불리려고 이런 자연스러운 지적 순환과 발전을 가로막는 일이다. 인류가 지적 문화적 자산을 서로 대가없이 공유하는 것이 전체적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아혜씨가 이런 주장을 하면서 그 결론으로 "표절 그 자체가 문제가 없다"고 표현을 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첫째, 글을 읽어보면, 마치 이아혜 씨는 표절의 반대말로 '순수한 창작물'을 설정하고 논의를 펴는 것 같다. 그러나 요즘 논란이 되는 '표절'은 단지 남의 지적 성과를 모방하거나 활용하는 수준이 아니다. 남이 쓴 논문의 구문이나 문단을 아예 통째로 그대로 들어와서 짜집기를 해놓고, 그게 자신이 쓴 논문이라고 주장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사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미 너무 유명해진 기반 연구 성과(뉴턴이나 아인슈타인)라던가, 다른 사람의 연구를 자신의 언어로 정리해 표현하거나 해석해 논문에 적는 행위는 인용 표시의 대상으로 보지 않거나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다. 최근 논란이 되는 '표절'은 이런 기준조차도 완전히 무시한 심각한 행위들이다. 따라서 논문 '표절'이라는 말을 이아혜 씨와 같이 순수한 창작물의 반대말로도 이해될 수 있게끔 불분명하게 사용한다면, 주의주장을 떠나 현재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을 부정확하게 인식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지적재산권 문제에 비판적인 많은 연구자들이 오히려 인용 표시나 출처 표기에 엄밀한 경우가 더 많다. 인용 표기는 지적 성과를 대가 있이 공유하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논문을 하나 쓰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자신의 생계 수단이자 지적 성과물에 대해서, 타인이 공정하게 그 공과를 평가해주는 것은 지적재산권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기본적인 예의와 '인격권'의 문제인 것이다. 당장 '카피레프트' 운동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보공유 라이센스 2.0 : 영리금지" 규칙의 내용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이용자는 비영리 목적으로 저작물(그 복제물 포함)을 ① 복제, 공연, 방송, 전송, 전시, 배포하고 ② 편집저작물 작성이나 데이터베이스 제작에 이용할 수 있으며 ③ 실연, 음반 제작 또는 방송물 제작에 이용할 수 있고 ④ 2차적 저작물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이용자의 의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저작물에 저작자의 성명을 표시하는 등 저작인격권을 존중해야 하고 ② 저작물(2차적 저작물 포함)에 정보공유라이선스를 표시해야 하며 ③ 저작물(2차적 저작물 포함)에 기술적 보호조치를 할 수 없고 ④ 2차적 저작물에 원저작물과 동일한 조건의 라이선스를 적용해야 합니다."
이 규칙은 분명히 영리 목적이 아닌 한, 지적재산권을 옹호하지도 않고 자유로운 지적 교류를 옹호한다. 그러나 동시에 저작자 성명 표시 등 저작자의 인격권 존중이 필요함을 명시하고 있다. 오늘날 학계에 비록 자본의 논리가 많이 침투되어있다보니, 특히 이공계를 중심으로는 이런 자유로운 지적 교류는 큰 한계에 마주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비판하고 싸워나가면서도, 연구자 개인에게 '정보 송유 라이센스 2.0'과 유사한 수준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정당하고 오히려 필요해 보인다.
또 정확한 참고 문헌 인용 표시는 사실 독자 입장에서도, 추가적인 자료 탐색이나 연구를 하는 데 그리고 해당 연구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아혜 씨의 기사에 포함된 "표절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표절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면서 쌩뚱 맞게 〈동아일보〉가 대학생들이 서로 과제물을 보여 주는 것도 표절 방조라고 주장하는 점은 나도 마찬가지로 매우 당혹스럽다. 이아혜 씨도 지적했듯이, 특권층이 거짓 경력과 논문으로 자기들 배를 더 불리려 하는 것과 일반 대학생들의 과제 제출을 동급에 놓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이런 〈동아일보〉식 시각의 비판은 '표절' 자체의 개념을 희석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학부생들의 과제 제출과 논문 표절을 동급의 사안으로 섞는 〈동아일보〉의 주장이 너무나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요즘 같이 팍팍한 시대에 학부생들이 시간에 쫓겨 서로 과제물을 참조하려는 것은 이해 못할 바도 전혀 아니다. 물론, 남의 과제를 레포트 사이트에서 다운 받아서 제출하는 것은 바람직한 문화는 아니지만, 이것이 문제일 수 있는 것은 학생들 스스로가 과제를 자기 공부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지 "표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학부생들이 설령 남의 과제나 기존 논문이나 단행본의 책 일부분을 특정 표시없이 그대로 옮겨왔다한들, 이는 그 행위가 갖는 의미나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했을 때 학위 논문 표절과는 비교되기가 어려운 사안이다. 어차피 학부에서 과제의 목표란 인용 규칙을 명확히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나와있는 여러 문헌들을 읽고 정리하도록 하는 것이지, 독자적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학부생들은 그 과제를 해낸 자신의 '독자적 능력'을 외부에 알려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것도, 과제 '경력'을 통해 사회적 특권을 얻는 입장도 아니다. 실제로 대학에서 교수님들은 학부생들이 '논문 표절'을 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의 과제 베껴서 내지 말고 스스로 공부해라"라고 당부하는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실 〈동아일보〉 류의 주장이 실제로 학계에서나 개혁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사회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지 개인적으로 다소 의문스럽긴 하다.)
정리하자면, 지적재산권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지적 교류를 옹호하는 좌파적 관점에서도 '표절'의 문제를 가벼이 여길 필요는 없다. 지배 계급이 하는 "논문 표절"은 더더욱이나 문제고 비판해야할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관점이 굳이 사회주의자들이 연구를 하거나 탐구를 할 때 "표절"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어질 이유는 없어보인다. 나아가 좀 더 정치적인 차원에서 표현하자면, 지적 재산권을 비판한다고 해서 지적 성과물에 대한 원저자의 '인격권'까지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갈 필요도 없어보인다.
‘지적재산권’도 문제지만 ‘표절’도 문제다?
장호종
서범진 동지의 주장은 모순이다. 표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개인’의 ‘지적 재산’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한국 행정학회에서는 표절을 ‘고의적으로나 또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타인의 지적 재산을 임의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지적재산권’은 문제지만 ‘표절’도 문제다 하는 식의 주장은 어정쩡한 타협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나 개혁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사회 비판적인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이나 학계에 몸담고 있는 지식인들은 대부분 ‘지적재산권’이 그의 생계 수단이기에 이 문제에서 민감하기 마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절이 문제가 아니라 지적인 기여를 평가해 그것을 생계수단으로 삼도록 하는 사회가 문제다. 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이런 식으로 경쟁을 강요받는다. 체제를 근본에서 바꾸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이 근본적 문제를 먼저 말해야 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 논리를 강화하려고 개인의 ‘개성’을 엄청나게 강조하면서도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와 동등한 개인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그들이 노동 현장에서 한 발명과 기여와 구실은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받는 반면 지배자들과 그들의 지배에 기여하는 지식인들의 기여는 대단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런 상황에서 허태열·문대성 같은 자들이 표절을 통해서 특권적 지위와 권력을 누리는 것이 불평등하고 위선적이라는 게 이아혜 동지의 핵심 논리였다.
사실 이아혜 동지는 특정 개인이 어떤 사상이나 이론에 기여한 바를 무시해도 된다거나 출처나 인용 표시 등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적이 없다. 그런 문제가 핵심이 아니고 ‘지적재산권’ 논리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서범진 동지가 그 문제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에는 ‘독창성’과 ‘개성’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핵심 수단으로 여겨지게 만든 주류 학계의 논리에 일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범한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들과의 ‘차이’보다 공통점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그들의 단결을 돕고 투쟁의 원동력이 된다. 사회주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집단적 해결책을 추구하는 사회이고 그 속에서 각자의 개성은 더 자유롭게 만발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숟가락을 누가 만들었는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그것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인들의 기여가 있었는지 풍부히 이해하는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꼬리표로 달리지 않아도 내 생각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뿐 아니라 자기의 말과 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노력에 감동받을 수 있을 것이다.
‘원저작자’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박연오
“‘지적재산권’도 문제지만 ‘표절’도 문제다?”에서 장호종 씨는 표절과 지적재산권을 둘 다 반대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썼다. 표절이 개인의 지적 재산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논리라면 자본이 노동자들의 생산물을 매일 훔쳐가는 것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재산권을 전제로 한 것이 될 텐데 말이다. 그리고 경제위기 시기에 노동자들이 지키려 하는 노동 조건은 임노동제를 전제로 한 것이다.
당연히 “장발장”이 빵을 훔친 것과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훔친 것을 똑같이 볼 수 없다. 그런 형식적인 논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실제 내용과 맥락을 살펴야 할 것이다.
지적재산권 제도는 이른바 “원저작자”의 명예 보호 등을 끼워놓았지만, 이 제도가 보호하려 하는 본질적인 대상은 기업의 상업권이다. 지식에 대한 기업의 상행위를 보장하기 위해, 발견된 지식을 대중이 자유롭게 복사하고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핵심이다.
필사본을 통해 책을 만들어내던 시절, 즉 지식을 담는 매체가 원시적이었던 시대에는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적재산권은 인쇄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본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자 비로소 교회와 국가가 대중의 지식의 보급을 통제하고 인쇄 업자들의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했다. 한국에서 꼴불견스러운 지적재산권 보호 선동이 확대된 것도 인터넷이 보급돼 대중이 소프트웨어, 음반, 영화 등을 쉽게 복사할 수 있게 된 2000년대 이후였다.
그래서 지적재산권에 반대하는 운동들도 대부분 대중의 지식 이용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 지식을 사기업이 움켜쥐는 것을 금지하고, 대중이 자유롭게 지식을 이용, 배포, 복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을 활용한 2차 생산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적재산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지식이 인류 전체의 지식 위에서 쌓아올린 일부라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것이 특허를 반대하고 대중이 지식을 자유롭게 이용할 근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곧장 이른바 “원저작자”의 기여를 무시해도 좋다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원자작자”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대중이 지식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해 공개한 소크박사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대중이 얻을 이익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지적재산권 제도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표절에도 반대하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즉, 내가 만든 저작물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2차 생산물을 만드는 것을 환영하되 그것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언급(인용)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지식의 출처를 명시하는 것은 개인이 연구해 공개한 지식을 기업이 마음대로 사유화해 특허를 내 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지적재산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산물을 대중에 공개하는 것을 지지하고 그들의 정신을 높이 산다. 다만 그런 활동이 지식이 체제와 상업에 종속되는 근본적 문제에 도전하지 않고 독립적인 생산물을 내놓는 데만 머무는 것은 아쉽다. 이런 활동은 소수의 생산자들만 참여할 수 있는 데다 결국 기업의 후원 따위에 의존하게 되고 만다. 오픈소스 운동의 리눅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독립적인 지식 생산은 개인의 명예욕과 열정만으로 지속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소외된 노동의 현실 속에서도 자기 노동조건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과학, 예술, 문화 등에 자기 삶의 일부를 바치곤 한다. 그러나 2010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사례에서 보듯, 그런 삶을 택한 사람들은 금세 삶이 곤궁해지고 생계의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식은 특권화되고 상업화된다.
그래서 장호종 씨의 “지적인 기여를 평가해 그것을 생계수단에 삼도록 하는 사회”가 근본적인 문제라는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든 사람이 생계에 필요한 물자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충분한 여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들은 온갖 다양한 분야에서 육체적·정신적 창조 활동을 해나갈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노동 조건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창조적 활동에 하는 데 삶을 바치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 사회가 얼마나 찬란하게 발전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표절은 잘못이지만 인격권 무시가 핵심은 아니다
최용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표절이란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이다. 이것이 대다수가 생각하는 표절의 의미다. 이런 의미라면 표절은 분명 잘못이다.
장호종 씨가 한국 행정학회의 표절 개념을 따온 것은 자본주의에서 표절이 “개인”과 “지적재산”과 관련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삼는 자본주의는 시·글·노래와 같이 모두 함께 배우고 즐기고 누릴 것들마저 상품과 재산으로 만들었다. 지적재산권은 소수만이 이런 지식과 문화를 만들고 누리도록 제한하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기회를 박탈한다. 따라서 표절이 잘못이라면 지적재산권은 훨씬 더 커다란 범죄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지적재산권을 보호해야 할 권리로 떠받들며 표절을 죄로 만든다. 표절은 적절하지 못한 행동일 뿐, 지적재산권처럼 사회 전체에 직접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지적재산권으로 표절을 공격하는 자본주의가 오히려 표절을 조장한다. 표절은 서범진씨의 표현처럼 오직 화려한 “꽃”만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뿌리와 줄기와 열매가 어찌되든 나홀로 화려한 성과를 내면 그만이다. 지식과 문화가 실제 형성되고 발전하는 “링크”따윈 필요 없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꽃”만 차지하면 된다는 자본주의 정신의 산물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반사회적이다.
게다가 표절을 대하는 지배자들의 위선은 역겹기 그지없다. ‘문도리코’처럼 표절을 해도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큰 곤경에 빠진다.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않다.
따라서 표절이 아무런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하면 곤란하다. 만약 그렇다면 표절에 따른 불평등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잘못이 아닌 것을 왜 누구는 크게 벌 받고 누구는 벌을 덜 받거나 안 받느냐고 비난하기 어렵다. 어떤 방식이든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는 건 필요하다. 특히 특권층이 표절이라는 편법을 동원해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행태는 정말 비난 받아 마땅하고 당장 그 부와 권력을 박탈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개인주의적 행태에 대해 서범진 씨가 말한 것처럼 원저자에게 “예의와 고무”도 없이 “인격권을 무시”해서 문제라고 한다면 핵심을 한참 비껴간 것이다. 표절이라는 고도의 개인주의적 행태에 대해 다른 “개인”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표절을 지적재산권과 같은 자본주의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을 어렵게 하고 또 집단지성을 통한 지식과 문화의 발전과 연관시켜 사회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어렵게 한다. 서범진 씨는 표절이 사회전체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점이 훨씬 더중요하다.
출처나 원저자를 밝히는 일은 개인의 영예를 빛내는 문제가 아니라 그 지식과 문화가 전파되고 발전하기 위해 그 반대로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아주 좋은 숟가락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른다면 더 좋은 숟가락 개발을 위해 그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파시즘이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면 원인을 캐고 확산을 막기가 힘들다. 표절은 개인들이 사회에 책임지고 사회는 개인들에게 책임지도록 하는 것을 방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