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배운다:
신디컬리즘의 성과와 한계

민주노총이 지도부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보여 주듯이 노동운동의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 대안으로 현장의 전투성을 강조하며 단결된 투쟁을 벌이자고 말하는 활동가들이 있다. 이런 태도는 개혁주의와 대립되는 정치세력화를 말하며 종파적 분열로 향하는 일각의 태도보다 분명 나은 점이 있다. 하지만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한계도 봐야 한다. 그 점에서 20세기 초 영국에서 등장했던 신디컬리즘의 장점과 한계를 다룬 글을 소개한다.

노동계급 편에 서기를 거부하고 명망을 쌓으려 드는 [영국]노동당, 파업을 배신하고 기업주들과 사회적 합의를 도모하는 노동조합 지도자. 어디서 많이 들은 말 아닌가? 이런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20세기 초 갓 태어난 노동당은 집권 자유당의 응원 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파업을 조직해도 노조 지도부를 기소하지 않기로 규정한 법이 통과되자 노조 지도자들은 정부와 잘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영국은 미국에,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에 경제적으로 추월 당하고 있었다. 기업주들은 이윤을 늘리고자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1900~10년 실질임금이 10퍼센트 떨어졌다. 식료품 가격이 상승했고, 기술이 발전해 제조업 등에 종사하는 숙련 노동자들이 해고 위협을 받았다.

한 세대의 노동계급 활동가들이 이에 맞서, 그리고 ‘파업이 아니라 의회로 사회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노동당의 노선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행동으로 가능하다”는 칼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렸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고자 했고, 노동조합을 그 수단이라고 봤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디컬리스트’라고 불렀다.

파업

1910~14년 임금 삭감에 분노해 후일 ‘대반란’이라고 알려진 파업 물결이 영국을 휩쓸었다. 파업이 확산하면서, 톰 만 같은 신디컬리스트 지도자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1910년 만은 《승리로 가는 길》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사회주의는 노동조합 운동으로만 이룰 수 있고 의회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썩었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 만은 기존 노조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을 하나의 거대 노조로 통합하려고 ‘산업신디컬리즘교육연맹’(ISEL)을 창설했다.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의 신디컬리스트들은 직접 행동을 중시하는 독립 노조를 만들었다.

1911년 영국 리버풀 항만과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리버풀의 운수 부문 전체 파업으로 번졌다. 만은 비공인 파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고 수천 명이 참가한 대중 집회에서 연설했다.

1911년 파업 중인 영국 리버풀 항만·철도 노동자들 “자본가들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려면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

자유당 정권은 [리버풀 근처] 머지 강에 전함을 파견했다. 정권은 8만 명이 운집한 대중 집회를 박살내려고 무장한 군부대를 파견했다. 군대는 파업 노동자 두 명을 사살한 끝에 파업을 파괴할 수 있었다.

1년 후 군대는 전국적 광원 파업을 파괴하는 데 투입됐다. 거기서 그들은 “쏘지 마시오”라는 표제를 단 신디컬리스트의 유인물을 발견했다. 만과 다른 한 명의 신디칼리스트는 “항명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ISEL의 기관지 〈신디컬리스트〉의 판매량은 1912년에 2만 부로 치솟았고, 〈신디컬리스트〉가 두 차례 조직한 노조 대표들의 대회는 약 10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표방했다.

신디컬리스트들은 행동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업이 성장할 때는 기막히게 훌륭했다. 신디컬리스트 지도자들은 기존 노조나 노동당의 지도부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업 물결이 시들해지면서 신디컬리스트의 힘도 약해졌다.

톰 만과 글래스고의 윌리 갈라처 같은 사람들은 좌파 정당의 당원이면서도 ‘낮에는 노조 활동을 하고 밤에는 선전 모임에서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식으로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을] 엄격하게 구분하려고 애썼다.

정치 투쟁

다른 신디컬리스트들은 정치 영역에서도 자본주의에 도전해야 하는 필요성을 완전히 일축했다. ISEL의 창립자 중 한 명인 AG 터프톤은 이렇게 주장했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정치는 사람들의 개인적 문제다. 자유당이든 보수당이든 노동자들이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오직 노동계급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만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대반란’이 벌어지던 바로 그때 커다란 정치 투쟁 두 개가 영국을 뒤흔들었다. 하나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벌인 여성 투표권 쟁취 투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 지배에 맞선 반란이었다. 게다가 영국·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긴장이 고조돼 유혈 낭자한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었다.

이런 투쟁들이 결합돼 영국 국가에 맞서는 강력한 도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불행히도 신디컬리즘 경향의 활동가들은 그런 호소에 거의 응하지 않아서 운동을 정치적으로 건설할 수 없었고, 1914년 8월 전쟁[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유럽의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처럼 영국 노동당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노조 지도자들은 전쟁 수행을 도우려고 파업 금지 조처에 합의했다. 독일 “야만인”을 악마화하는 거대한 운동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톰 만을 비롯한 신디컬리스트들은 대체로 개인적으로는 전쟁에 반대했지만, 전쟁 광풍에 맞설 수 있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1916년 즈음 파업이 활기를 되찾았다. 클라이드노동자위원회[1915년 영국 글래스고에서 비공인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이 만든 현장조합원 조직] 회장이었던 신디컬리스트 활동가 갈라처는 정부의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공격에 맞서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클라이드노동자위원회의 직장위원들은 산업 투쟁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사하고 반전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심지어 갈라처는 전쟁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 존 멕클레인이 클라이드노동자위원회에 가입하는 것도 금지했다. 멕클레인이 클라이드노동자위원회가 전쟁 반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신디컬리스트들이] 산업 투쟁을 정치 투쟁과 결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노동당이 점점 커지는 전쟁 혐오 정서의 수혜자가 됐다. 노동당 지지율은 6퍼센트에서 1918년 20퍼센트로 올랐고, 4년 후에는 그 두 배로 올라갔다.

그럼에도 톰 만, 윌리 갈라처, 셰필드의 금속노동자 JT 머피 같은 신디컬리스트 지도자 다수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 매력을 느꼈다.

레온 트로츠키는 신디컬리스트들을 “자본가에 맞서 그저 싸우기를 소망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개혁주의자들과는 달리) 자본가들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볼셰비키는 언제나 파업을 지지했고, 대중 파업을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국가를 마비시키는 수단으로 봤다.

투쟁에서 겪은 경험 덕에 볼셰비키는 노동조합 기층 조직을 지지했는데, 그런 기층 조직이 미래에 공장위원회나 소비에트[러시아혁명기에 만들어진 노동자 평의회]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기층이 직접 선출하는 이런 조직은 투쟁을 이끌 뿐 아니라 새로운 노동자 국가의 기초가 될 수도 있었다.

트로츠키는 신디컬리즘을 노동계급 내의 혁명적 경향이라고 규정했지만, 동시에 신디컬리즘의 심각한 이론적 결함 몇 가지를 지적했다.

트로츠키는 기업주들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매우 중요한 무기지만, 노동조합은 본질상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에 그친다고, 즉 결국에는 맞서 싸우던 기업주들과 합의에 이르는 것으로 [투쟁을] 제한한다고 주장했다.

전투적으로 파업을 벌인 뒤에도 협상을 해야 한다는 압력 때문에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개혁주의적 방향으로 이끌린다. 총파업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에 도전하게 되지만 총파업만으로 기존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트로츠키는 1905년 러시아혁명의 실패를 두고 이렇게 썼다. “투쟁에서 적의 힘을 빼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총)파업의 구실이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파업은 혁명의 군대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총파업이든 혁명의 군대든 그 자체로 국가 혁명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혁명은 옛 지배자들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야 한다. … 총파업은 그에 필요한 전제 조건을 창출할 뿐이다. 총파업만으로는 그런 과제[권력 쟁취]를 수행하지 못한다.”

권력 장악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장악함으로써 자본주의 국가를 우회할 수 있다는 주장에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국가 권력을 그저 부정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국가 권력을 넘어서려면 국가 권력을 직접 장악해야 한다. 국가 기구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바로 혁명적 정치다. 이를 포기하는 것은 혁명적 계급으로서 필수 과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의 지적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혁명적 수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한다.

노동조합은 정치적 신념이 어떤지와 상관 없이 모든 노동자를 포괄한다. 그러나 언제나 노동계급 중 일부는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고 분열적·애국주의적 사상을 거부하지만, 다른 일부는 자본주의 그 자체와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반동적인 관념을 모두 수용하기도 한다.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이들 중 어느 한 쪽이 다수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전투적 소수가 정치 조직을 건설해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1930년대 후반까지도 유럽과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신디컬리스트와 혁명적 사회주의자 사이에 논쟁이 계속됐다. 이 논쟁에는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과 스페인의 전국노동자연맹(CNT) 같은 대중적 조직들도 참여했다.

갈라처나 만 같은 일부 사람들은 치열한 논쟁 끝에 공산주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늘날 새로운 세대의 노동조합 활동가와 반자본주의자 들은 신디컬리스트 관련 논쟁을 보며 개혁주의의 영향력을 떨쳐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