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마르크스주의 - 운동에서 정당이 하는 구실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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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반자본주의 운동 안에는 우리와 일반적 원칙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억압에 반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은 모두 수많은 조직 노동자들의 창의성·활력·상상력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우리가 파시스트[영국국민당(BNP)]에 맞서 최대한 광범한 세력을 단결시켜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보수당에 철저하게 반대하고 자유민주당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들은 노동당이 결코 진보적 대안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혁명 정당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의 경험에 비춰 보면 정당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를 바꾸는 운동들에 기대를 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옳다.
어떤 부류의 세력이 민중 혁명을 일으키는가? 언제나 그 대답은 아래로부터의 위대한 사회운동들이라는 것이다.
17세기 영국 내전에서 의회 측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하는 수공업자들의 운동들이 거듭거듭 개입해 반(反)왕당파 세력을 전진시켰기 때문이었다.
“상퀼로트”[‘큘롯 바지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는 프랑스 대혁명을 왼쪽으로 몰아갔다.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것은 러시아의 노동자·농민·병사 들이었다.
그 뒤 모든 민중 혁명에서 ―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타도에서도 ―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사회운동들은 새로운 조직 형태를 만들어 냈다. 병사평의회, 파업위원회, 노동자평의회, 지역 “소비에트”, 칠레의 “코르돈” 등등.
이들은 직접적 투쟁의 필요에서 발전해 나왔지만, 더 민주적으로 아래로부터 통제되는 새로운 사회의 시작을 대체로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 기구들은 노동조합, 반전운동가들·공민권운동가들·반파시스트들의 지역 조직들, 세입자 기구들, 기타 등등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운동들의 토대였다.
그런 기구들이 효과적일 때는 그들이 특정한 투쟁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을 모두 포함시켜 행동 통일을 극대화하려 할 때다.
아래로부터
혁명적 사회주의의 핵심은 진정한 운동은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변혁적 활동을 통해서만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요구를 위해 싸우고 자신의 조직을 발전시킬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상 자체로는 불충분하다. 현실 세계에서 실제 운동들은 온갖 경향들과 자극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에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런 사상의 차이는 반전 운동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모두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동료 노동자들 중에는 믿을 만한 투사들도 있지만 잠재적 파업 파괴자들도 있고 대다수는 그 중간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
운동을 토론과 논쟁이 계속 벌어지는 공간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우리는 운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논쟁들은 부분적으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둘러싼 것이지만, 특별히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들도 있다.
권력자들을 설득해 태도를 바꾸도록 로비하는 게 가장 좋은가? 아니면 강력하고 전투적인 운동들을 건설해 권력자들의 결정권 자체에 도전해야 하는가?
우리가 투쟁하는 쟁점들은 서로 동떨어진 것들인가, 아니면 모두 서로 연결된 것들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연결돼 있는가? 우리는 다른 나라 운동들의 실수와 성공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과 그 밖의 다른 많은 문제들을 둘러싸고 다양한 대답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운동들 안에서는 온갖 집단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때로는 외부 기구들(정당, 종교단체, 직능단체, 기타 등등)과 연결돼 저마다 어떤 제안을 내놓는다.
이런 제안들 중 일부는 운동을 탈선시킬 것이다. 일부는 운동의 결집력을 약화시킨다. 일부는 운동 안에 분열의 씨앗을 뿌린다. 일부는 운동의 범위를 협소하게 만들려 한다.
조직된 목소리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을 결성해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하지 않으면 다른 견해들이 유력해질 것이다. 분명한 사회주의적 주장이 없어서 [운동이] 끔찍한 패배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 공산당 관료들은 1968년 5월 운동을 억제하고 분열시킬 수 있었다. 1979년 이란 혁명에서는 우파 성직자들이 혁명의 지도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역사는 그런 사례들로 가득하다.
1973년 칠레에서 그랬듯이, 심지어 공공연히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집권한 정부에서도 아주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옛 정권의 군 장교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야만적인 반혁명의 토대가 됐다.
오직 노동자들의 조직된 운동만이 낡은 국가 기구를 노동 대중에 직접 책임질 수 있는 새로운 기구로 대체해 그런 재앙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민중 반란의 “자생성”에 의존하는 것, 그래서 모든 장애물을 일소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모든 위대한 운동에서는 민중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엄청나게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자생성은 자생성이다.
“자생적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은 계속 보수 정당들에 투표한다. 자생적으로, 고용주들에 대항하는 투쟁은 노동조합 조직뿐 아니라 파업 파괴자들도 만들어 낸다. 자생적으로, 개량주의 사상은 혁명적 사상과 경쟁한다.
실제의 운동들은 “동질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늘 동일하지도 않으며 그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 안팎에서는 많은 조직된 목소리들이 저마다 주의를 끌고 지지를 얻으려 서로 경쟁한다.
그러므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을 구축해 자신의 주장들을 내놓을 수 있는 방법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런 논쟁의 한복판에서 그들은 언제나 최대한의 행동 통일, 가장 광범한 국제주의,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전투적이고 자주적인 행동을 옹호하는 주장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