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진로 논쟁:
‘우리부터 세금 더 내자’가 진보가 해야 할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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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노동자 증세가 큰 반발을 사고 있는데도, 자유주의 신문과 진보진영의 일부가 복지 확대를 위해서는 노동자도 증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박근혜의 세제개편안이 “전향적이고 진보적인 조치”였다며, “우리 국민이 소득세 더 낼 테니 … 대기업과 부자들이 세금 더 내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건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도 “솔직하고 당당하게 증세를 제안하라”며 노동자들이 증세를 받아들여야 부자 증세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무상급식, 무상보육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라며 노동자들을 압박하기까지 한다. 또 ‘부자 증세 구호를 버리고 복지 증세 구호를 들자’고 말한다.
장하준 교수도 복지는 “국민이 ‘공동구매’하듯 부담해야” 한다며 노동자들에 대한 증세를 지지한다.
이에 민주당도 박근혜의 세금개편안을 “세금폭탄”이라고 비판하던 것에서 금세 물러섰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민주당이 세금폭탄 운운하며 조세 저항을 부추겼다’고 비판하며 “증세가 필요하다고 국민들께 솔직히 설명하는 게 정치의 본분”이라고 목소리를 보탰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복지를 원하면 세금을 더 내라’는 보수 언론들의 주장과 뭐가 크게 다른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 증세론은 평범한 대중뿐 아니라 가장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복지 확대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첫째, 보편적 증세론은 이제까지 복지가 확대되지 않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가리는 효과를 낸다.
조세도피처에 숨긴 돈이 9백조 원이 넘는 것에서 보듯, 기업과 부자 들은 막대한 탈세를 저질러 왔다. 삼성 이건희는 4조 5천억 원에 이르는 차명재산 보유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상속세를 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 2조 원에 이르는 세금을 떼먹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나라가 “서민과 중산층에 매우 유리한 조세 구조”(양재진 교수, 〈한겨레〉)라는 말은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게다가 한국은 2012년 기준으로 OECD 34개국 가운데 법인세율이 21위로 낮은 편인데도 정부는 기업들에게 막대한 감세 혜택을 줘 왔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법인세 비과세 감면액이 55조5천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부자 감세는 유지하고 노동자 증세를 하겠다고 분명하게 밝혔는데, 이를 “진보적 조치”라고 환영하는 것은 제 발등을 제가 찍는 것밖에 안 된다.
둘째, 고임금 노동자가 먼저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려, 복지 확대를 달성할 동력이 오히려 떨어지게 만든다.
이런 논리가 커질수록 복지가 더 필요한 저소득 노동자들은 고소득 노동자들이 세금 인상에 반대해 복지 확대가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반대로 고소득 노동자들은 돌아오는 복지 혜택은 얼마 없는데 자신들의 세금 부담은 크게 늘어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격차는 계급 간에 존재한다.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편이다. 10대 기업 임원 보수가 3백8퍼센트 증가할 때 노동자 임금 증가는 29퍼센트로 10분의 1에 그쳤다(〈한겨레〉). 노동자들은 심각한 경제 위기의 고통을 감내해 왔지만 이런 희생은 결코 복지 확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부유세
따라서 지금은 더 나은 처지의 노동자에게 양보하라고 말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기업과 부자 들이 먼저, 더 많은 세금을 내 복지를 실질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며 투쟁을 호소할 때다. 반면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사회적 대타협의 방안을 마련”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봐도 ‘타협’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으로 복지 확대가 가능했다.
영국의 NHS와 같은 무상의료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진적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는 분위기에서야 도입됐다. 한국에서 전 국민이 적용받는 건강보험이 만들어지고, 연금제도가 도입된 것도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가능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확대하려면 ‘부자에게 증세를 해서 노동자·서민에게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부유세 도입은 2002년 대선 때부터 진보정당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러나 2011년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통합을 추진하고 야권연대를 강조하면서 부유세 요구를 후퇴시켰고, 지금 일부 진보정당이 보편적 증세론을 펴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물론 자본가들은 어떻게든 복지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고 싶어 하고, 이 때문에 스웨덴, 영국 같은 나라에서조차 사실상 고소득 노동자들이 낸 세금으로 저소득 노동자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이런 복지라 하더라도 반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먼저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은 복지 확대를 가로막는 진정한 책임을 가리고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약하게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