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테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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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의 폭력이 테러리즘을 낳지만, 혁명가들은 사뭇 다른 투쟁 형태를 위해 싸운다.
우파들은 항상 지난 3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 테러 같은 사건들과 혁명을 연관시키려 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그런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폭력이 없는 사회, 지금 우리가 겪는 억압과 차별이 과거지사가 돼 버린 사회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폭력을 일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그러나 계급 투쟁과 무관하게 소수가 저지르는 관공서나 민간시설 폭파, 항공기 납치, 암살 등의 테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 이유는 테러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착취·억압·폭정·전쟁의 근본 원인이 사악한 지배자 개인이나 악독한 정부가 아니라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돼 있으며 다수의 노동 덕에 먹고사는 소수 계급이 생산수단을 지배하기 때문임을 보여 주었다.
지배계급 타도와 그들이 의존하는 경제 체제 타도는 수많은 개인들을 살해하거나 협박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경제 체제의 주역인 새 계급의 투쟁으로만 가능하다.
이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해 보면, 자본가 계급을 패배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노동계급 대중의 조직된 투쟁뿐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뿐 아니라 그 목표, 즉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위로부터의 혁명, 심지어 노동계급을 대리해서 행동한다고 자처하는 세력들이 추진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조차도 한 무리의 착취자들·억압자들을 다른 착취자들·억압자들로 교체하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방법―리플릿 배포, 서명 운동, 노조와 정당을 통한 대중 시위, 선거 운동과 대중 파업―은 모두 노동자들의 의식·자신감·조직하기를 발전시켜 그들 자신의 행동을 진전시키기 위한 조처들이다.
테러 방법은 이런 전반적 전망과 모순된다. 마드리드에서 그랬듯이, 흔히 테러리스트들은 지배자들이나 억압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 대중을 공격하는 등 완전히 잘못된 표적을 겨냥한다. 이것은 특정 민족이나 인종 집단 지배자들의 행위를 그 집단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잘못’ ― 더 나아가 ‘범죄’ ― 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잘못은 우파가 흔히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이것은 좌파가 극복해야 할 과제인 인종적·민족적·종교적 분열을 강화시켜 노동계급의 투쟁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심지어 더 신중하게 표적을 선정한 경우, 예컨대 폭군 개인이라든가 억압 국가의 고위 관리 등을 공격할 경우에도 의도치 않게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잘못을 저지를 위험 부담은 여전히 남게 되고, 그 정치적 결과는 다르지 않다.
테러리즘의 공통된 결과 또 하나는 테러로 무너뜨리려 하는 바로 그 국가의 억압 기구를 강화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테러 행위는 완전히 경멸받던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모종의 순교자나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78년에 붉은여단이 전 이탈리아 총리 알도 모로를 납치·살해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에조차 ― 테러의 표적이 누구나 인정하는 폭군이고 무고한 사상자 한 명 없이 완벽하게 그를 처형했을 때조차 ― 테러 활동은 마르크스주의적 원칙에 어긋난다. 레온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목적 달성을 위해 권총 무장만으로도 충분하다면 도대체 왜 계급 투쟁을 위해 노력하겠는가?…엄청난 폭발로 고위 인사들을 위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도대체 왜 당이 필요하겠는가? 집회, 대중 선동, 선거가 왜 필요하겠는가?…
“우리가 개인 테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런 테러가 의식 고양에서 대중이 하는 역할을 하찮게 만들고 대중 스스로 무기력함에 체념하게 만들고 대중으로 하여금 언젠가 위대한 복수자나 해방자가 나타나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트로츠키를 인용하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트로츠키는 테러리즘과 관련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을 탁월하게 요약한 일련의 글을 쓴 바 있고, 이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지금도 구할 수 있는 팸플릿 《맑스주의와 테러리즘》이다. 둘째, 그 글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 테러리즘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드니키, 즉 민중주의자들, 그 가운데 특히 나로드나야 볼랴
테러 위협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테러리즘에 대한 태도와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태도를 구분했다. 테러리즘은 비타협적으로 거부했지만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는 늘 공감을 표시하며 그들의 개인적 용기를 항상 칭송했다.
지배계급 정치인들과 그들의 언론은 테러리스트들을 ‘겁쟁이’, ‘악마’, ‘비인간적’이라고 끊임없이 비난한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런 생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테러 위협’을 핑계로 짜르 체제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을 누그러뜨리려 하지도 않았으며, 테러리스트들에 반대해 짜르 체제 편에 서지도 않았다. 그들이 테러리즘을 비판한 요지는 진정한 혁명 투쟁과 비교했을 때 테러리즘은 비효과적이며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역사는 그들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결국 짜르 체제와 러시아 부르주아지 둘 다 무너뜨린 것은 폭탄 테러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대중 행동이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정식화된, 테러리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태도는 시간의 검증을 견뎌 냈고, 몇 십 년 동안 하나의 행동 지침이 돼 주었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다양하고 강력한 테러 활동들이 벌어졌고, 이를 보면 몇 가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먼저, 우익과 파시스트들의 테러리즘이 상당히 존재함이 분명하다. 북아일랜드의 오렌지
다른 형태의 테러리즘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주로 1970년대에 극좌파와 학생 반란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단체들로, 미국의 웨더맨, 영국의 앵그리 브리게이드, 독일의 바더-마인호프 그룹, 이탈리아의 붉은여단 등이다. 대체로 이런 단체들은 그들을 배출한 대중 운동이 쇠퇴하는 것에 절망하고 이에 조급하게 대응한 결과다. 부분적으로 붉은여단을 제외하면, 그들은 대중 기반도 없었고 지배계급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도 거의 없었다. 그들의 주요 효과는 좌파를 와해시키고 혼란에 빠뜨린 것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과제가 그런 분위기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피억압 민족을 대변하려 애쓰는 다양한 민족주의 테러 단체들, 즉 아일랜드 공화국군
팔레스타인 인티파다가 가장 잘 보여 주듯이, 때때로 테러 전술이 대중 저항과 거의 결합되고, 이것이 분명히 우리 비판의 언어와 논조에 영향을 미치거나 미쳐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좌파인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 공격이나 이라크 저항 세력의 공격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일반적 설득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타협적 반대라는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속 주장해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 타도는 서로 연관된 과제들이며 이 과제들을 완수할 수 있는 세력은 국제 노동계급뿐이라는 것이다.
존 몰리뉴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