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고대 왕조에 현대 국적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가

근대에 발명된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1896년에도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했던 듯하다.

흔히 애국지사로 알려져 있는 민영환은 고종의 명을 받아 러시아에 파견됐다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배편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 때 독도 근처를 지나면서 남긴 말이 “저 섬은 다케시마(竹島)라고 불리우는데 일본의 섬이라고 한다”였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요즘처럼 명확히 경계지워진 근대적 국토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근대 민족국가의 개념으로 고대 왕조국가의 ‘민족적 정체성’을 구획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일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일 것이다.

최근 고구려사를 둘러싸고 중국과 (북한을 포함해서) 한국 사이에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고구려사를 중국에 귀속시킬 것인가 한국에 귀속시킬 것인가가 쟁점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베이징사회과학원에서 중국 동북3성의 사회과학원과 그 지역 대학 및 연구기관을 동원해 추진하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를 말한다.

이것은 특히 2002년 북한이 고구려의 고분군(사실 그것이 고구려의 것인지, 한사군 계열의 한족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줄 것을 신청하자 본격화했다.

중국은 이에 대응해 2003년 초 집안과 환인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중국측의 근거는 전통시대 중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동아시아 책봉 체제다. 이 체제에 따르면, 고구려의 왕은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았고, 그와 동시에 중국 지방관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수·당 왕조가 고구려를 지방정권 취급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논리로 하자면 신라·백제·왜[일본] 역시 책봉을 받았으니 중국사로 편입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 거기까지 주장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영토적 구획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 중국이 확보하고 있는 국토에서 벌어진 역사들이 곧 중국의 역사라는 태도다.

역사 전쟁

고대 중국 주변의 왕조들이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것은 자신의 지배 영역에서 권위를 확립하려는 것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들의 주변에 대해서도 지배적 지위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책봉 체제 내에서 한편으로는 완전한 자율적 발전을 보여 왔다. 이것을 일방적인 지배-종속 관계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현대의 중국은 마치 자신들이 수·당 왕조와 연속적인 역사체인 듯 동일시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50개가 넘는 소수민족들을 통합·통제하는 것, 그리고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소수민족이 전 국토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과 관계 있다. 중국은 이 지역을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자국의 영토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에 역사학을 동원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이 과제를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른바 “현대적 중화민족의 재창출”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심지어는 한족이 세운 왕조뿐 아니라 요·금·원·청 등 북방 종족들이 중원에 세운 왕조조차 모두 중국의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는 한국측의 태도도 중국과 다르지 않다. 한국은 고구려의 종족적 구성을 현재의 한국 민족과 동일한 핏줄로 상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신화일 뿐이다. 고구려 자체가 당시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왕조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이후 ‘한민족’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매우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고대 한반도 북부 지역 종족들의 변화와 다양함은 너무나 심해서 왕조의 변천만으로 그들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고대 왕조의 사회적 구성으로 봤을 때도 그들이 서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왕족’과 직접 생산을 담당했던 민중은 동일한 인간 집단으로 취급된 적이 없다.

‘동족’을 노예(이 사회의 주된 생산관계가 노예제였던 것은 아니지만)로 삼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고 팔았던 사회 속에서 근대의 민족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까?

고구려와 현대 한국의 민족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근거 중 하나는, 후대의 고려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이 곧바로 현대의 민족의식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옛날부터 여러 왕조들은 자신들의 왕권의 유서 깊음과 정통성을 항상 고조선·부여·고구려에서 찾는 전통이 있었다. 발해도 그랬고, 심지어는 확실히 이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금 왕조에서조차 계승되고 있다.

민족주의

반만 년 단일민족이라는, 현대에 들어와 상상된 신화는 ‘고구려의 정체성 지키기’라는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낳고 있다. 고구려인 자신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고구려의 정체성’을 1천몇백 년이 지난 현대인들이 찾아 주겠다는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있던 여러 왕조들이 마치 하나의 단일민족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움직였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신라·백제는 결코 서로를 ‘동일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구려가 세운 중원비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가리켜 “동이(東夷)”(동쪽 오랑캐)라고 적고 있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신당서》〈신라전〉에는 신라인들이 발해인을 상상했던 설화가 전해지는데, 여기에서 발해인은 “키가 3장에 온몸이 검은 털로 덮여 있고 톱 같은 치아와 열쇠 같은 손톱을 가진 거인 … 사람을 잡아먹고 여자를 약탈”하는 완전히 이질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한반도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러일 전쟁 즈음한 1904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지 경험에 대한 반발로 형성됐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이 이 때 창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야 비로소 고구려의 역사가 갑자기 근대적 대중매체를 통해 ‘민족의 역사’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족주의는 단지 저항의 이데올로기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구성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 역시 민족주의적 역사관이다. 이런 역사관은 민족국가가 초역사적으로 늘 존재해 왔던 것처럼 믿게 만든다.

그리고 매우 빈번하게, 사회가 민족으로 통합돼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으로 첨예하게 분단돼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