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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다시 냉전으로 돌아가는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 제국주의와 러시아 제국주의의 대립은 오늘날의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 준다.

냉전이 해체된 후 지금까지도 세계화 담론을 주도한 사람들은 이제 국민국가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과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은 역사 속의 유물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우크라이나에서 보고 있는 것은 명백히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정학적 경쟁”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냉전의 부활(신냉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미국 네오콘과 대다수 주류 언론이 이런 주장을 내놓고 있다. 전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도 “냉전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냉전이 다시 올지는 푸틴에게 달렸다”고 말했다.

신냉전이 왔다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데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냉전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서방)과 러시아가 지정학적 주요 지역에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강대국의 갈등이 커지면서 냉전 때와 유사한 진영 논리가 팽배해졌다는 것도 신냉전론의 근거다. 예컨대 일부 주류 언론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의 군사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의 구실이 커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유럽연합(EU) 집행위의 대외관계 담당자 닉 위트니는 우크라이나 위기가 “나토의 관점에서는 천우신조”라면서 “나토에 수명 연장의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연합뉴스〉). 또한 동아시아에서도 미국·일본과 중국의 갈등이 커지면서 중국·러시아·북한 대 미국·일본·남한이라는 냉전 때의 갈등 구도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주장이 많다.

진영 논리?

그러나 신냉전이 도래했다는 주장은 여러모로 오늘날의 제국주의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냉전 체제란 국가 간 경쟁이 양대 초강대국 블록이라는 양극적 틀 속에 욱여넣어져 양국의 동맹국 지배자들이 그 질서에 복종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질서를 뜻한다. 이런 점에 비춰 보면, 그런 질서가 세계적 차원이나 유럽(혹은 동아시아) 지역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은 냉전 때 서방 진영에서 압도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미국은 그때만큼의 힘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20여 년 전 동구권이 붕괴할 때 미국은 전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으로 패권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미국의 헤게모니는 상대적으로 약화해 왔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전 세계의 경제력 분포가 장기적으로 변화해 온 것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경제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하락해 온 반면에, 유럽과 동아시아 일부 국가들은 역동적으로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이렇게 경제가 성장한 나라들은 소련이 붕괴하고부터는 다소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전후로 미국의 헤게모니는 큰 타격을 입었다. 금융 위기와 테러와의 전쟁 실패 때문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대러시아 전략에 미국의 유럽 쪽 동맹국들을 일사불란하게 규합하지 못해 왔다. 러시아와 긴밀한 경제 관계를 맺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는 2008년에 미국이 구상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계획을 거부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크림 반도를 합병한 러시아에 강경한 제재 조처를 하는 데서 많은 유럽 국가들이 주저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한국 지배자들 다수는 전통적 한미동맹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이를 유일한 선택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부상하는 중국의 전략적 이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배자들 사이에서도 만만치 않다.

지역 강대국의 도전

그리고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화하면서, 중국과 러시아 같은 국가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높일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러시아 경제는 2000년대 중반 천연가스를 비롯한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커다란 이익을 봤다. 이를 바탕으로 푸틴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미국이 추진한 나토의 동진과 러시아 포위에 맞서 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을 러시아 세력권에 다시 편입시키는 전략을 추진할 수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중국은 연평균 8~10퍼센트의 경제 성장을 이뤘고, 이것은 가히 세계사적 사건이라 할 만했다. 이 덕분에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의 주요 행위자로 급부상했고 군사력도 빠른 속도로 성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중국 지배자들은 자국의 안정적 경제 성장을 위해 주변 지역에서 지정학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 제국주의 국가들은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제국의 과잉 확장”이라고 부른 교착 상태에 미국이 처해 있는 것을 이용했다. 다른 열강과 달리, 미국은 헤게모니를 유지하려고 전 세계 곳곳에 역량을 넓게 분산시켜야 하는 동시에, 2000년대 초·중반에는 중동에 군사력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같은 기간에 중국과 러시아는 자신의 역량을 자국의 이해관계가 걸린 주변 지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2008년 이후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이, 동유럽 등지에서는 미국과 러시아가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며 갈등을 키워 온 것이다.

2012년 세계 주요국들의 GDP(국내 총생산) 비교 미국의 경제적 지위가 장기적으로 하락했지만, 미국과 나머지 주요 선진국들의 GDP 격차는 여전히 크다.

그렇지만 지역 강대국의 도전을 신냉전의 도래라고 규정하는 것은 사태를 상당히 과장하는 것이다. 비록 소련 붕괴 직후에 비해 러시아 경제가 상당히 회복됐지만, 미국에 비하면 그 격차가 매우 크다. 중국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지만, 여전히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비록 재정 적자 때문에 군사비를 줄이고 있지만, 미국은 경쟁국들에 견줘 여전히 압도적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다. 전 세계에 퍼진 1천여 곳의 해외 군사기지 네트워크와 동맹국들을 통해, 미국은 군사력을 세계 곳곳에 투사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 러시아 등 경쟁국들이 하루 아침에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국 주변의 국가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에서도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에 한참 못 미친다. 예컨대 중국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늘리고 있지만, 이 지역에는 인도·일본·호주·남한 등 만만찮은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나라들은 서로 분열돼 경쟁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과 러시아도 엇갈리는 이해관계 때문에 대외 정책에서 단결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미국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간질을 시도해 왔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몇몇 지역에서 미국의 우위에 도전하며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은 미국의 세계적 지위에 도전할 형편이 못 된다. 따라서 앞으로도 일정 기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다극화하는 세계

그러나 오늘날 제국주의 질서가 미국이 주도하는 단극적 질서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지정학적·경제적 경쟁을 벌이며 다극화하는 질서로 점차 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가 2008년 11월 발간한 보고서 《글로벌 트렌트 2025》에 내놓은 전망이 바로 그러하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국제 체제는 2025년에는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변해 있을 것이다. … 2025년에는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국력 차이가 계속 좁혀짐에 따라 국제 체제가 세계적 다극 체제로 변해 있을 것이다. … 비록 미국은 그때도 세계 최강의 행위자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미국의 상대적 힘은 심지어 군사적 측면에서도 약화될 것이고 미국의 의지 관철 능력은 더 제한될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제국주의 질서가 신냉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세계가 평화롭고 자유롭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열강의 이해 각축으로 세계는 더욱 유동적이고 불안정해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는 미국의 정책 때문에 오랫동안 동아시아 정세는 불안정에 휩싸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불안정이 미래에 특정한 돌발 사태와 맞물린다면, 이것이 강대국 간 정면 충돌로 가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좌파의 과제

냉전 시절에 양대 진영이 첨예하게 경쟁을 빚자, 이 대립은 당시의 좌파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 특히 양대 블록 가운데 좀더 진보적으로 보이는 진영을 지지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강했다. 이것은 양 진영의 갈등이 ‘민주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좌파 내에서 더 큰 혼동을 일으켰다.

지금 그때만큼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은 없지만, 여전히 국제 좌파들은 서방과 러시아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듯하다. 예컨대 다수의 동유럽 좌파는 유럽연합에 대한 환상 때문에, 또 서방 진영의 좌파는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 때문에 반대편의 제국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남한에서도 일부 좌파는 미국 제국주의와 대립한다는 이유로 중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보지 않거나, 티베트 억압 같은 중국 제국주의의 문제에 침묵하곤 한다.

이런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도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민중의 소리〉에 장문의 기사가 실린 정기열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서구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지구촌의 모든 반제자주세력이 러시아와 함께 이심전심으로 음으로 양으로 연대하고 협력하면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서 싸우고 있는 세계반제자주대결 차원에서 이해해야 옳다” 하고 주장했다. 〈진보정치〉에서 이채언 교수도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구도에서는 중립적 입장이 성립할 수 없다. … 친구가 아니면 적일 뿐이다” 하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선진 자본주의 열강이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을 벌이는 체제를 말한다. 여기서 중국과 러시아처럼 미국과 경쟁하는 강대국들도 제국주의 체제의 일부다. 러시아와 중국 등이 미국보다 더 약한 세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자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경쟁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국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점에서 미국 제국주의와 다를 게 전혀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우리는 우리 지배자들에 맞서면서, 반대편에서 자국 지배자들에 대항하는 노동자들과 국제주의적 단결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좌파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레닌이 《사회주의와 전쟁》에서 한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더 오래됐고 [식민지를] 많이 잡아 먹은 강도[영국, 프랑스]에 맞서 더 강하고 더 젊은 강도[독일]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전부를 전복하기 위해 강도들의 싸움을 이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사회주의자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즉, 이 전쟁은 노예제를 공고히 하려고 벌이는 노예 소유주들 사이의 전쟁이라는 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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