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와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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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대한 현대 한국인의 ‘애착’은 유별난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 경험과 기억에 일차적으로 근거하기 때문에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독도가 언제나 한국인의 관심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독도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그것도 특히 일본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아주 최근에야 ‘발견된 영토’다. 독도가 초역사적으로 한민족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적은 결코 없었다.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독도에 대한 역사적 권리 주장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서기 512년 신라의 우산국 정벌까지 끌어올리고 있지만, 이 사실로부터 현대의 독도 분쟁을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선 〈삼국사기〉의 이 기사는 현재의 울릉도에 대한 얘기이지, 그로부터 동남쪽으로 9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바위섬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우산국이 실제로는 한반도와는 다른 독자적인 소문화권을 고려 중기까지 이어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 시대의 기사들은 현재의 울릉도를 여전히 ‘우산국’으로, 그 주민을 ‘우산국인’으로 타자화해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우산국은 동북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황폐해졌고, 조선 시대 이래로 정부의 공도(空島)정책(바다에 대한 출입 통제와 섬을 무인도화하는 조치)으로 사실상 무인도화했다. 다만, 조선 정부는 조세나 군역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가는 조선인을 색출하기 위해 가끔 관리들을 보내 탐사케 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시대 섬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식은 매우 부정확했고, 독도라는 바위섬의 존재는 거의 몰랐거나 혹시 알았더라도 관심을 두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래서 애국지사로 알려진 민영환이 1896년에조차 독도를 가리켜 “일본의 섬”이라고 한 것은 천진난만한 실수가 아니다.
발견된 영토
조선 정부는 19세기 후반에야 울릉도 개척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 때 발견한 것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에 조선인 1백20여 명과 일본인 70여 명이 몰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 언제나 한국측 자료가 우월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1899년 간행된 《한국지지》는 대한제국의 위치를 “동경 124도 30분에서 130도 35분 사이”라고 하여 독도를 제외시켰다.
독도의 존재에 대해 일본은 당시의 조선보다 훨씬 정확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17세기 들어 일본은 당시 무인도인 울릉도 부근으로 어업활동을 활발히 했었는데, 이 때 울릉도로 가는 항해 기점이 독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독도가 당연히 자신의 영역이라는 관념이 존재했던 듯하다. 그런 점에서 독도가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독도가 분쟁의 핵으로 등장한 것은, 심지어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을 때도 아니다. 이 때 조선 정부의 항의와 짤막한 신문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거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는 흔적은 없다.
예를 들어, 그 후 일제 시대에 발간된 근대적 잡지들은 조선 시대 당시 정부에 의해 월경죄로 처벌받은 안용복을 민족의 영토를 되찾은 위인으로 재탄생시키지만, 이 때의 핵심도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인한 점이 강조됐을 뿐이다.
독도의 존재가 비교적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해방 후인 1948년의 일이다. 당시 주일미군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했는데, 이 때 미군의 오폭(이조차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지만)으로 조업중이던 조선 어민 1백여 명이 사망한 사건 때문이다.
사실상 독도가 본격적인 영유권 분쟁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1952년 이승만이 ‘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면서부터다. 어업구역 조정에 참여한 일본측이 협상을 지연시키자, 이승만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으로 평균 60해리에 달하는 해역을 배타적 주권구역으로 선포했다. 당시 어업구역 분쟁은 매우 첨예했는데, 예를 들어 한국 정부는 1947∼62년에 2백82척의 일본 어선을 나포하고, 3천5백여 명의 일본 선원을 강제 구금하고, 8명의 일본 선원을 사살했다. 바로 이 때부터 독도는 전 국민적 관심사로 등장하고 반일 정서의 상징이 됐다.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없지만, 만일 미래에 일본이 실제로 무력을 동원해 독도를 강점하려 한다거나, 이에 준하는 실질적 압력을 행사한다면 당연히 반대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일상적 시기에 독도 문제는 다른 맥락으로 봐야 할 점이 있다.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분쟁은 언제나 있어 왔고, 독도 분쟁도 이 상태로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살 동맹
한일 양국의 지배자들은 언제나 이 문제로 민족주의적 선동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한국의 지배자들은 마치 일본이 당장이라도 독도를 침공할 것처럼 끊임없이 공포심을 조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1960년대 한일협정 과정에서 김종필이 일본에 “독도를 폭파시키자”고 제안했듯이, 한국 지배자들이 이 문제에 관해 언제나 ‘민족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한국 지배자들이 단 한 건의 일본인 투자를 거부한 적이 있던가? 한일FTA처럼 자국의 노동자를 더욱 쥐어짜려는 데에 한국과 일본 지배자들은 ‘공통의 관심’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북한을 겨냥한 한일 군사 동맹 역시 강화되고 있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한국 지배자들과 일본 지배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독기어린 민족주의 선동은 표면적으로는 적대적이지만, 이를 통해 자국 민중을 통제한다는 점에서는 공생 관계다. 오히려 평범한 민중으로 하여금 자국 내 해결해야 할 진정한 현안들, 그리고 진정 도전해야 할 적을 흐리게 만든다.
정당하게도,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제국주의적 팽창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라도 독도 문제에 대한 지배자들의 민족주의 선동과는 다른 독립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대한 강력한 반대는 한국 지배자들의 민족주의 선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지배자들은 이미 이라크 학살 동맹에 일본과 어깨를 걸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군사대국화의 또 다른 피해자들인 일본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서 나올 것이고, 우리는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 대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