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자본주의와 인종차별’ 기사의 '시초 축적' 개념에 대한 나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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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연대〉 133호에 실린 이정원 동지의 기사는 자본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해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기사의 '인종차별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문단은 자본주의적 노예제도·노예무역이 오늘날의 참혹한 인종차별의 토대라고 설명한다. 나도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며,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가장 적절한 설명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정원 동지가 이런 과정을 '시초 축적'이라는 이론틀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에는 선뜻 동의가 가지 않는다. 해당 기사에서 '시초 축적' 개념은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
"노예 무역은 자본가들이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노예로부터 추출한 이윤의 상당 부분은 운하·철도·선박 같은 산업 생산에 투자됐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자본의 시초 축적'이라고 불렀다."
내가 정확히 읽은 것이라면, 여기에서는 단순히 '노예로부터 축출한 이윤'이 자본가들이 부를 쌓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시초 축적'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 같다. (혹은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크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시초 축적 개념은 좀 더 정교한 개념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김공회에 따르면 "여기서 핵심은 ... 자본-임노동 관계의 확립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노예로부터 추출한 부가 자본주의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을 '자본의 시초 축적'과 연결시킨다. 이 설명은 자본-임노동 관계의 확립과는 크게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쓰인 시초 축적 개념이 데이비드 하비가 (잘못) 사용하는 시초 축적 개념에 가까운 것 같아 우려스럽다.
"... 하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그 자신의 ‘외부’를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까지도 시초 축적의 범위 안에 집어넣는다. 바로 이것이 그가 ‘강탈에 의한 축적’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으로 개념화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시초 축적은 단순히 '강탈'에 의한 폭력적인 축적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다. "시초 축적에서 중요한 것은 ... 노동조건은 특정한 소수의 손에 집중돼 자본으로서 또 토지로부터 쫓겨난 농민들은 임노동자로서 재편"되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하비는 시초 축적의 "폭력성"만을 강조하고, 그것이 곧 시초 축적의 핵심이라고 말함으로써 마르크스의 개념을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김공회 2006, '데이비드 하비의 제국주의론 비판', 『마르크스주의 연구』 5호) (여담인데, 김공회가 지적했듯, 폭력적 강탈=시초 축적이면 자본주의에서는 거의 모든 부의 축적이 시초 축적이다.)
또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중요한 이론가인 알렉스 캘리니코스도 《마르크스21》에 실린 ‘금융화와 오늘의 세계경제’에서 하비의 '탈취에 의한 축적'이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17~18세기에 자본주의가 확장하는 데 노예 무역에서 수취한 잉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고, 이것이 인종차별의 진정한 뿌리라는 것은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정원 동지가 이야기 했듯이 '인종차별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뿌리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도 도전'해야 하는 것은 여지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을 위한 개념들이 좀 더 엄밀하게 사용된다면 이와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었을지라도 약간의 '태클'이 필요했다고 생각해 이렇게 독자편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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