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읽기》:
우익의 엉터리없는 피케티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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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피케티 열풍이 일고 있다. 그가 분석한 나라들 못지 않게 한국에서도 부와 소득 불평등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의 소득 최상위 10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45퍼센트를 가져간다. 일본이나 유럽 나라들에 견줘서도 소득 불평등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21세기 자본》에서 피케티가 말한 핵심 주장은 단순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자본주의 체제와 긴밀히 연관돼 있고, 자본 축적이 진행될수록 이런 불평등이 증대하고, 불평등이 심각할수록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고율의 소득세와 재산세(글로벌 자본세)를 통해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피케티의 이런 주장에 우익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우익의 반응은 아전인수, 침소봉대, 왜곡이다. 자유경제원 원장 현진권 등이 펴낸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읽기》가 대표적이다.
아전인수, 침소봉대, 왜곡
강원대 교수 신중섭은 자본주의 발전이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낳긴 하지만 인류 역사가 불평등했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불평등이 농경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신중섭은 인류학자 알렝 떼스타를 언급하며 자기 주장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알렝 떼스타는 사회 불평등의 기술 경제적 바탕은 잉여 식량의 대규모 비축과 이를 위한 정주(정착 생활)에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다만 그는 수렵·채취민 사회란 야생의 자연 자원을 순화시켜 식량으로 개발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의미인데, 야생에서 순화까지는 일련의 점진적인 단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렵·채취의 구석기 시대에서 잉여 식량의 비축을 위한 정주 경제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각각의 원시 부족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사회적 불평등은 잉여물의 생산과 이 생산물에 대한 지배를 둘러싸고 형성된 계급이라는 사회적 구조에서 기원한다. 따라서 불평등은 인류 사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계급 사회의 특징이다.
자유경제원 원장 현진권은 “상대적 빈곤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빈곤층은 존재”하므로 “빈곤을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상대적 빈곤은 있을지라도 경제의 발전으로 절대적 빈곤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난 2월 송파동 세 모녀의 안타까운 자살은 뭐란 말인가?
그는 한국의 불평등 수준은 절대 높지 않다고 주장한다. “시계열적으로 악화되는 뚜렷한 추이를 볼 수 없다.”
하지만 동국대 김낙연 교수는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의 상위 20퍼센트의 실질소득은 41퍼센트 상승했지만 하위 20퍼센트는 24퍼센트 하락했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은행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기초로 계산한 한국의 자본/소득 비중(피케티가 제시한 불평등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은 2000년에 5.8에서 2012년 7.5로 크게 상승했다.
현진권은 피케티의 경제학이 “상대방에 대한 배 아픔의 인간 정서를 부추기는” 것이며 “소수에 대한 세금 강화로 배 아픔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경희대 교수 안재욱도 배 아픔의 정서로 소수의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기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피케티는 사람들을 가난으로 인도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불평등의 완화가 아니라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다 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이 심화되면 사회가 세습 자본주의로 전락하고 민주주의도 후퇴하기에 불평등을 막는 대안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피케티가 오히려 불평등을 더 심화시킨다고?
안재욱의 논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경제가 발전하려면 사유재산 보장과 자본 축적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사유재산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사실상 자본의 몰수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자본을 몰수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빈곤과 곤경을 겪다가 몰락”했다!
그는 “자본 축적에 대해 대단한 반감을 갖고 자본 축적에 대한 중과세”를 하면 누가 투자하겠냐고 강변한다. 투자된 자본에게 이윤이 많이 생겨야 투자가 많이 이뤄진다는 낙수효과 논리이다.
피케티가 주장하는 고율의 글로벌 자본세(즉 재산세)는 급진적이긴 하지만, 자본 몰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투자는 미래의 투자수익률에 따라 이뤄지므로 이윤이 많아야 투자가 이뤄진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기업들이 이윤으로 벌어들인 현금을 어마어마하게 보유하고 있지만 ‘투자 파업’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피케티는 경제 성장이 이뤄지면 소득이 고르게 분배된다는 이른바 ‘쿠즈네츠의 가설’이 현실에서는 틀렸음을 통계 수치를 통해 보여 줬다. 또한 그는 축적된 자본의 소유 여부에 따라 소득 수준에 차이가 난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잘 지적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좌승희는 경제적 불평등이 경제적 번영의 필요조건이라고 솔직하게 주장한다. 경제적 불평등이 시장 질서의 본질이며, 경제적 결과의 불평등이 있어야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양립하기 어렵다. 우익의 민낯이다. 시장경제가 (노동자 대중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다 준다는 말이 허구임이 우익 자신의 논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좌승희는 “비민주적이고 반자유적인 정치 체제의 경제 성공 사례”가 바로 박정희이고, 이 사회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한국 경제의 저성장과 분배 악화는 물론 오늘날 유사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또한 발전 친화적 불평등을 거부하는 지나친 평등주의를 추구해 온 결과[이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등장한 보수 정권들과 이들이 강력하게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두고 평등주의라니! 이번 세계경제 위기의 진앙지인 미국에서 조지 W. 부시와 앨런 그린스펀이 도대체 어떤 평등주의 정책을 추진했던가?
이렇듯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읽기》 필자들은 피케티의 핵심적 내용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맞게 다반사로 왜곡하고, 심지어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주장한다.
피케티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의 필자들에게 딱 적절한 말을 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내 책에 우려할 게 아니라, 불평등 자체를 우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