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자본과 이데올로기》(토마 피케티, 문학동네):
풍부한 근거로 불평등과 부당함을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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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1세기 자본》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토마 피케티가 이번에는 《자본과 이데올로기》라는 꽤 두꺼운 책(한글판은 1297쪽)을 출판했다. 불어판은 2019년 11월에 나왔지만 영어판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진 3월에 나왔다. 코로나19가 빈곤층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빈부 격차를 더 벌린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평등을 다룬 이 책이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21세기 자본》이 사회의 빈부 격차가 발생하는 이유를 분석하려는 저작이라면,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폭로하고 그 체제를 옹호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통렬히 비판한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인간사회든 저마다의 불평등에 합당한 근거를 대야만 한다. 그러지 못할 때는 정치사회적 구성물 전체가 붕괴될 위험에 처한다. 그래서 어느 시대든 불평등이 존재하고 응당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구조화하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규칙을 진술하기 위한, 일군의 모순된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하나는 “이런 스펙타클한 변화들, 극단적 자산 불평등”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피케티는 전 세계 100여 명의 동료들과 힘을 모아 만든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ID.world)에서 자료 대부분을 확보했다.
그 덕분에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이전 저작보다 훨씬 국제적이다. 《21세기 자본》이 서구 일부 국가들의 데이터에 기초했다면,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중국, 인도, 중동 국가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들, 아프리카, 러시아 등지에서 벌어지는 불평등을 전방위적으로 다룬다.
2018년 유럽에서 소득 상위 10퍼센트는 국민소득의 34퍼센트를 차지했다. 중국에서는 41퍼센트, 러시아에서는 46퍼센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54퍼센트, 인도에서는 55퍼센트, 브라질에서는 56퍼센트, 중동에서는 64퍼센트를 차지했다(그래프 1).
특히 미국의 불평등 증가는 매우 극적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프랑스 등에 견줘 불평등 정도가 비슷하거나 덜했고 생산성과 생활수준이 평균 2배가량 높았다. 하지만 2010년대에 미국은 전보다 훨씬 불평등해졌고, 생산성 면에서 과거의 우위도 완전히 사라졌다(그래프 2).
1980∼2018년 불평등의 증대는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피케티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했던 서유럽에서나 “소유자 사회”가 위기에 처한 1914~1945년에는 불평등이 약화됐지만, 소련과 동유럽이 몰락하고 등장한 “하이퍼자본주의” 시대에는 불평등이 다시 증대했다(그래프 3).
정치적 선택
지난 500년 동안 전 세계에 퍼진 사회 불평등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었고, 이데올로기가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 피케티의 핵심 주장이다. 그래서 피케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을 흉내 내어 “오늘날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의 추구의 역사였을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불평등이 소유자들의 정치적 선택임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면 불평등도 완화되거나 사라질 수 있음을 함축한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없앨 여러 방안을 제시한다. 사회적 소유와 기업 공동 경영 확대, 사유재산에 대한 누진소유세, 20억 유로 이상의 재산에 90퍼센트의 세율 매기기, 개인별 누진적 탄소세, 국제 금융 자산 등기부를 만들어서 자본 이동 통제하기 등. 실현 가능성을 따지기 전에 이 방안들이 매우 급진적이란 점이 눈에 들어온다.
피케티가 제안한 또 다른 방안은 기본소득을 넘어선 기본자본 개념(책에서는 “자본지원”으로 표현돼 있다)이다. 피케티는 기본소득을 기본적으로 옹호하지만 “여타의 모든 제도장치가 불필요해지는 일종의 기적의 해결책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며 기본소득 만능론을 경계한다. “중요한 건 기본소득을 누진소유제·누진소득세·자본지원·사회국가를 포함한 보다 야심 찬 패키지의 일부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피케티는 “가난한 50퍼센트가 상당 정도 자산을 보유하고 사회경제활동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면,” (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개혁 개념을 민간 자본 전체로 확대하고 이를 영구적 과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사적 소유에 대한 누진세로 재원을 확보해 청년 각자에게 자본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일인당 평균 자산이 20만 유로이기에 이것의 60퍼센트인 12만 유로(약 1억 6000만 원)를 25세가 되는 모든 청년에게 지급하자는 방안이다. 부모에게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는 청년들이 이 돈을 종잣돈 삼아 창업 등 자립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논리다.
참여사회주의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불평등한 현실을 드러내는 데에서는 그만인 책이다. 하지만 그의 대안에는 약점도 있다.
첫째, 피케티에게서는 불평등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 특정 이데올로기가 사적 소유를 옹호하고 사회 불평등을 정당화할지라도 그 이데올로기가 사회 불평등의 원인일 수는 없다. 피케티의 제안처럼 “인민계급”(노동자계급을 의미한다) 청년들에게 기본자본을 나눠 주고 부자들에게 누진소유세를 매겨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불평등이 다시 발생할 것이다.
불평등은 대부분 교육이나 개인 능력, 성격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한다. 사회적 생산 과정에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노동과정을 통제하고 노동 성과물을 무상으로 가져가는 현실(마르크스는 이를 착취라 표현했다)을 바꾸지 못하면 사회 불평등은 온존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부자들에게 고율의 누진세를 매기면 분명 불평등이 약화할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정책을 진심으로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부자들에 대한 세금이 착취를 없애지는 못하고 따라서 사회 불평등의 원인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세금 부과는 불평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정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이 책에서 “착취”를 몇 차례 언급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로 쓰지는 않는다.)
둘째, 피케티는 사회 구성원들이 정치적 선택을 통해 “불평등주의체제의 신속하고도 급진적인 전환”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제시하는 정치적 선택은 의회주의적이다. 스웨덴을 예로 든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는 스웨덴이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납세유권자 중심의 소유자 사회였으나 이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가장 평등한 사민주의사회”가 됐다고 본다. 스웨덴이 “불평등주의체제의 전환에서 집단행동과 그 사회정치적 과정의 중요성을 훌륭히 입증해준 사례”라고 강조한다. 이때 “집단행동”은 “1890∼1930년에 이례적인 인민 동원을 이끌어낸 스웨덴 사민주의 노동자운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피케티는 “스웨덴의 경우에는 법치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정치적 의회주의적 숙의”가 급진적 전환의 조건이었다고 주장해서 노동자 운동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여긴다. 또, 스웨덴의 복지국가가 전후 장기호황이라는 드문 조건에서 노동자 투쟁이 강제한 결과였음을 못 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스웨덴의 마르크스주의자 마데레이네 요한손이 쓴 본지 기사 ‘스웨덴 복지국가의 신화와 실상 ―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참고하시오.)
피케티가 참여사회주의의 요소들로 제시한 강력한 누진적 소유세, 보편적 자본지원, 임금 노동자-주주의 의결권 균형 등과 같은 급진적 개혁은 의회주의적 방식으로는 달성하기 힘들다. 자본가 등 권력자들이 크게 반발할 것인데, 이들은 이윤 침해에 맞서 온갖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자본의 해외 도피나 심지어 무력까지 사용할 수 있다.
의회주의적 대안을 추구하는 (좌파) 개혁주의 세력들은 이런 반발에 제대로 맞설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은 집권 뒤 지지자들을 배신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피케티는 중도 좌파 개혁주의 세력들의 실패를 지적하지만,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 내 개혁을 추구하는 입장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에 부담을 줄 경우 알량한 개혁조차 달성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와 사적소유를 극복하고 참여사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법률제도와 조세재정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기업 내 권력을 더 폭넓게 분유分有하여 자본의 진정한 사회적 소유를 제도화”하고 “막대한 소유에 강력한 누진세를 적용”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변화들은 훌륭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
피케티는 자본주의와 사적소유는 물론이거니와 법률이나 조세제도를 바꾸는 데에서도 변화의 힘을 지닌 노동계급에 호소하는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피케티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갈등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이 갈등이 계급투쟁의 주요 형태 중 하나임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런 약점은 피케티가 계급과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의 필연적 결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빈부 격차가 증대하고 경제 위기뿐 아니라 환경 재앙까지 초래하는 자본주의의 실패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일부 진지한 사람들에게 이 체제의 모순을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주의자들이 토론과 논쟁에 개입하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몇 가지 약점이 있음에도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출간이 반가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