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흡한 법안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진상 규명 활동이 시작되길 바라는 가족대책위의 심경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의 온건파 리더들이 제정된 특별법을 성과라고 과장하는 것은 겸연쩍다. 11월 1일 세월호 참사 2백 일 범국민추모대회에서도 이런 주장이 반감을 샀다.
참사 이후, 부패와 무책임의 실상이 드러날 때마다 분노가 커져 왔다.
5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특별법 서명에 동참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충격이 얼마나 큰지, 운동의 저변이 얼마나 넓은지 보여 줬다.
민영화 반대, 작업장 안전사고 등을 ‘제2의 세월호’라고 부르며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세월호 운동에 동감했다.
그러나 온건파 리더들은 특별법 투쟁을 국회에 압력 넣는 입법 청원 수준으로 제한하려 노력했다.
이는 제1야당인 새정치연합에 기대는 것으로 귀결됐다. 새정치연합 박영선이 7월 19일 집회에 나와 기소권은 이미 포기했다고 밝혔는데도 이를 비판하지 않고 묵인했다. 이런 태도가 운동의 김을 뺐다.
그러나 사회 운영의 우선순위 문제를 주되게 국회 내 입법 협상의 과제로만 한정하는 것은 입법을 위한 동력이란 점에서 봐도 무기력한 정치다. 세력관계에서 우리가 밀리면 있는 법도 지키지 않는 것이 지배자들이다.
진상 규명은 노동계급과 그 자녀들을 생죽음으로 몰고 가고, 구조를 외면한 이윤 경쟁 체제의 기득권 집단과 싸우는 문제다. 이들은 치부가 드러날까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그러므로 ‘원내 협상’이 아니라 조직 노동계급의 동원에 초점을 둬야 했다. 박근혜 퇴진 같은 급진적 견해들도 반영해야 했다.
민주노총 상층 지도자들도 기회를 놓쳤다. 아마 하루 파업도 가능했을 6~7월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휴가철을 지나자(김영오 씨의 단식으로 분위기가 올랐던 8월 중순에는 금속노조가 투쟁에 기여할 기회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참가 열기도 점차 식어 버렸다.
결국 가족대책위는 ‘여야 합의가 미흡하지만, 이에 따른 입법화를 막기 힘들다’며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권의 마녀사냥과 박대, 9월 이후 동력 쇠퇴 속에서 지친 탓일 것이다.
특히 대책회의 온건파 리더들의 후퇴도 유가족들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