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1989년 혁명 ― 동유럽 정권들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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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동유럽은 반란에 휩싸였고 베를린 장벽과 스탈린주의 체제들을 끌어내렸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환영했다고 토마시 텡글리-에번스가 전한다.
“견고했던 모든 것이 대기 속으로 녹아 버린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 쓴 말이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회들도 무너진다는 것을 설명한 이 대목은 1989년에 특히 잘 들어맞았다.
1989년 유럽에서 세계 질서를 무너뜨린 혁명 과정이 시작됐다. 동구권 나라들에서 정권이 먼저 무너졌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그 나라들을 지배했던 소련이 곧이어 무너졌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고, “사회주의”를 자처하던 정권들이 사실은 잔인한 독재국가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1989년 10월만 해도 동독 지배자들은 건국 40주년을 축하하고 있었다. 집권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은 매우 강경한 스탈린주의 정당이었다.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자신들의 폭압적 국가 기구가 자신들을 영원히 지켜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불만이 자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교회 안에 고립돼 있던 급진적 활동가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호소에 응할 태세가 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슷한 정서가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폴란드 정권은 이미 수년에 걸친 위기 끝에 자유 선거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헝가리는 서쪽 국경을 개방했었는데, 이는 동구권을 서방에게서 차단시킨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낸 것이었다.
동독 지배자들이 건국 40주년을 자축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1백만 명이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1월 9일, 동독 정권이 주민들의 이탈을 막고자 1961년에 만든 베를린 장벽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동독과 서독의 청년들이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무너뜨리고 함께 춤추는 장면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11월 16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브라티슬라바 시로 몰려 갔다. 다음날 수도 프라하에서는 훨씬 더 많은 학생들이 행진에 나섰다. 프라하에서 경찰이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자 그 대응으로 “벨벳 혁명”이 시작됐다.(큰 폭력을 쓰지 않고 정권을 몰아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사흘 뒤 50만 명이 프라하 시의 바츨라프 광장을 가득 매웠고, 수만 명이 지역사회, 대학, 작업장에서 시위에 나섰다.
공산당 지도부와 정부는 사퇴했고, 덜 강경한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프라하에는 다음과 같은 낙서가 등장했다. “[공산당] 사무총장은 총파업을 받아라.” 12월 말, 공산당의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11월에 지도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임기를 5년 연장했다. 동유럽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였을 차우셰스쿠는 수락 연설을 통해 동유럽에서 일어난 반란의 물결을 비난했다. 그는 [서부 도시] 티미쇼아라와 [수도] 부쿠레슈티의 시위대를 진압할 목적으로 즉시 탱크를 보냈다.
극악한 탄압은 역풍을 불렀다. 12월 21일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그를 권력에서 끌어내렸고 크리스마스에 처형했다.
붕괴
강고한 듯 보인 동구권 지배자들은 일년 만에 하나씩 무너졌다. 공식적으로 “노동자 국가”를 자처한 이 세력들에 맞서 노동자들이 떨쳐 일어나자, 오랜 독재의 비결이었던 국가의 위협은 순식간에 그 효력을 잃었다.
1989년 혁명은 자유시장이 승리했고 자본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서방 지배자들은 주장한다. 많은 좌파가 이 주장에 수긍했는데, 동구권에 비판적이었던 좌파들조차 그랬다.
어떤 사람들은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흠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보적인 사회라고 여겼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소련만이 미국의 패권을 억제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우리 〈소셜리스트 워커〉는 이 혁명들을 환영했다.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이 정권들에 맞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것을 지지해 왔다.
우리는 잔혹한 스탈린주의 체제들이 사회주의라면 미래가 없다고 봤다. 진정한 노동자 국가만이 제국주의에 진정으로 도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가 보기에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였다. 그 체제들은 “국가자본주의”였다.
지배계급인 국가 관료는 다른 곳 자본가들과 비슷하게 움직였다. 다시 말해, 소수가 다수를 착취했고, 그들은 훔친 부의 일부분은 자기 몫으로 챙겼지만 나머지는 미래의 착취를 위해 투자했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관료들은 서방과의 군사적·경제적 경쟁에 매어 있었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세력권과 자국 노동자들(그들이 의존하는)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원했다. 이를 위해 동구권에서 엄격한 검열과 대규모 비밀 경찰로 대표되는 엄청난 탄압이 필요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노동자들이 자유와 사회주의(그 체제들의 지배자들이 대변한다고 떠든 바로 그 사상)를 진정으로 요구할 위험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에 반대한 인물들은 중형을 선고 받거나 심지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동시에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는 압박을 끊임없이 받는다는 점에서 국가자본주의 체제들은 불안정했고 노동자들의 저항에 거듭 부닥쳤다.
1953년 동독에서 건설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고 ‘1953년 노동자 반란’을 일으켰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주요 산업 도시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시위대는 공산당 깃발을 불태우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소련 탱크가 와서 시위를 진압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중 [수도] 부다페스트 노동자들은 노동자 위원회를 건설했다. 이 역시 소련 탱크에 진압됐다.
1980년대 초 폴란드 북부에서는 대중파업 동안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사회를 운영함에 따라 “이중권력”[기존 정부와 새로운 노동자 권력이 공존하는 상황]과 유사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일련의 투쟁들은 스탈린주의나 서방 자본주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노동자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89년 혁명은 국가자본주의에서 자유시장 자본주의로의 게걸음을 나타냈다.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 일부는 머지 않아 서독과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거리에 나왔던 사람들은 더 좋은 생활수준뿐 아니라 위선이 없고 지배자와 나머지 사람 사이에 격차가 사라진 사회를 꿈꿨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빼앗기고 가난으로 내몰리는 오늘날, 1989년에 다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내기 위한 반란의 기운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