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마르크스주의 - 개혁을 위한 투쟁은 혁명가들을 단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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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 대중은 새로운 민주적 제도를 바탕으로 사회를 집단으로 통제한다.
이런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은 대부분의 시기에 소수의 전유물이다. 그 사상은 일상의 경험과 모순된다. 반대 이념의 지배적 형태는 개량주의이다.
선거에서 노동자들은 대부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나 자유주의 정당을 지지―물론 그들이 투표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한다.
개량주의 정당들은 변화를 바라는 노동자들의 요구와 염원 덕분에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정당들은 결코 노동자들을 동원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에 대한 염원을 의회 정치라는 좁은 틀에 가두는 구실을 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자본주의의 한계 안에서 사소한 개혁을 제공할 뿐이다. 여유 자원 일부를 보건과 교육에 지원하는 것, 낮은 수준의 최저임금, 노동시간과 작업장 안전 관리 등등. 그들은 자본주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않는다.
작업장에서 대다수 노동자들은 기회가 닿으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그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방어하고 개선한다.
시시포스의 노동
노동조합의 목표와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파업은 생산과정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지만 노동자들이 착취의 현실 세계로 복귀하면서 끝난다.
노동조합의 임무는 조건 개선을 위해 사용자와 협상하는 것이지, 사용자를 노동자 통제로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반자본주의·반전 운동 안에서도 개량주의 사상이 유력하다. 우리는 은행과 기업의 권력을 박탈할 것이 아니라 국제 금융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제안을 듣는다.
유엔이나 그 비슷한 기구들이 자본주의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고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런 기구들을 이용하자는 계획도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개량주의 사상이나 조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우리의 과제 중 하나는 직접적 논쟁과 선전을 통해 개량주의 사상이나 실천과 경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에 칼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 내에서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만으로도 노동자들의 요구로서 충분하다고 주장했던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투쟁을 “시시포스의 노동”이라고 묘사했다. 언덕 꼭대기까지 돌을 굴려 올라가지만 그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끝없는 투쟁 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른바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의 길’에 반대해 온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 선전으로는 일상적 시기에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설복할 수 있다. 사회주의 사상으로 끌려온 그 소수는 더 광범한 운동에서 결정적 구실을 해야 한다.
소수만으로는 사회주의를 쟁취할 수 없다. 사회주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실천에서 개혁과 혁명 사이에 무슨 대단한 장벽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을 위한 투쟁이 곧 개량주의인 것은 아니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혁명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개혁을 위한 전투들은 사회 혁명에 꼭 필요한 준비 과정이다. 그 전투들을 통해서 노동계급 운동은 발전하며 운동의 약점과 강점을 확인한다. 또한, 그 전투들을 통해서 사회주의자 투사들은 전략과 전술을 배운다.
“시시포스의 노동”이라는 묘사와 관련해 로자 룩셈부르크가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은 그 신화에 나오는 왕이 아주 튼튼한 근육을 단련시켰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크든 작든 모든 투쟁에서 지도적 구실을 하려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집단적 힘과 조직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옆으로 비켜서서 추상적 혁명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추구하는 가장 단호한 투사로서 행동하는 동시에, 운동이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육
전투 수행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게 마련이다.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대중 투쟁을 제한하려 애쓴다. 우리는 언제나 가장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투쟁 수행 방식과 관련해 현장조합원들의 통제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혁명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진정한 증거는 대중 운동 안에서 추상적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실제 쟁점으로 제기된다. 그리고 모든 투쟁에서 직접적으로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 혁명의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은 정말로 발생한다. 다른 모든 것이 준비나 훈련이었을 뿐인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에 개혁과 혁명은 서로 뒤엉킨다.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혁명, 즉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살펴보자. 당시 운동의 요구는 평화·빵·토지였다.
각각의 요구는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개혁일 뿐이었다. 이 요구들이 실천적 제안, 즉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와 결합되면서 혁명에 힘이 실렸던 것이다. 소비에트는 노동자·병사·농민 스스로 만들어 낸 대중 민주주의 기관이었다.
볼셰비키의 주장은 간단했다. 우리가 요구하는 개혁을 성취하려면 우리가 만든 대중적 기관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 조처들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상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전체 개념에서 핵심이다.
미래에도 새로운 대중 조직들이 출현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 형태를 알 수는 없고, 내부 논쟁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조직들은 대중 투쟁으로부터 나온 것일 것이다. 그런 조직들은 개혁을 위해 투쟁할 것이고 기존 조건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시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이 조직들이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개혁과 혁명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