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
아이시스와 아랍의 반혁명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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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랍 혁명이 틔운 희망의 불꽃은 4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 사그라진 듯 보인다. 미국이 또다시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집트에서 쫓겨났던 독재 정권은 전보다 더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부활했다. 2013년 8월 14일 하루에만 무슬림형제단 지지자 1천 명 이상이 살해됐고, 정치적 반대파 4만 명이 수감됐다.
하지만 서방 언론이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이하 아이시스)’의 부상이다. 아이시스는 폭력적이고 종파주의적인 지하드 단체로 2014년 6월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을 장악했다. 아이시스는 미국인·영국인을 참수하는 영상을 공개하고, 여성을 억압하고, 다른 종교와 다른 이슬람 종파를 공격하고, 같은 수니파라도 자신에게 적대적이면 학살을 서슴지 않는다.
이 글은 이처럼 잔인하고 종파주의적인 세력이 어떻게 이라크와 시리아에 들어서게 됐는지를 분석하고 진정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아이시스를 분석하기 위한 마르크스주의적 도구들을 제시할 것이다. 둘째, 아이시스가 기반을 잡을 당시 이라크와 시리아의 구체적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셋째, 이슬람주의 운동 내 개량주의 경향이 아랍 혁명 이후 위기에 빠진 것은 아이시스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분석 방법
1) 불균등·결합 발전 이론
지난 40년 동안 아랍 세계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따른 변화가 진행됐다. 수익성 좋은 국영 기업들이 민영화됐는데, 많은 경우 집권당 관료의 친인척에게 불하됐다. 공공부문은 수익성 위주로 재편됐고 서민층이 더 많은 책임과 비용을 떠안게 됐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아랍 대중에게 재앙이었다. 그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는 아랍 세계의 이미 높았던 불균등·결합 발전* 정도를 더한층 높였다. 즉, 오늘날 예전의 국가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와 결합돼 더 큰 긴장을 낳은 것이다.
오늘날 중동 사회의 ‘불균등’ 발전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는 시리아 혁명이 전파되는 방식이다. 2011년 시리아 혁명은 신자유주의 변화 속에서 궁핍화된 대중이 고향을 떠나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번졌다. 이 지역들은 이후 아이시스의 시리아 내 근거지가 된다.
국가들 사이에도 불균등 발전이 전개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지역뿐 아니라 세계적 수준에서도 영향력이 커졌다. 이 영향력을 바탕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 혁명과 시리아 혁명에 개입할 수 있었다.
‘결합’ 발전은 기존의 정치·사회적 관계와 신자유주의가 융합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신자유주의는 아랍 세계의 국가를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국가와 자본의 관계를 더 밀접하게 만들었다.
한편, 신자유주의가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바람에 이슬람주의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국가를 대신해 교육과 의료를 제공하면서 빈민과 하층 중간계급에게 “세속 국가”에 문화적으로 저항하고 신앙을 가지라고 촉구했다.
2) 유물론
많은 논평가들이 아랍 세계에서는 종교가 결정적 영향력을 미치는 것인 양 말한다. 여러 문제가 이슬람의 “천 년도 더 된 구원(舊怨)”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그런 관념의 물질적 토대를 추적한다.
이라크에서는 지난 25년 동안의 전쟁과 UN(사실상 미국의) 제재와 미군 점령으로 말미암아 종파주의가 자라날 물질적 토대가 생겨났다. 전기가 끊겼을 때 성직자들은 주민들에게 전력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정부와 연줄이 있는 부족 지도자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들을 돌봤다.
내전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이라크 같은 조건에서 개인들과 그 가족의 생존은 부족 지도자나 종파적 민병대를 통해 일자리를 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 덕분에, 서로 대립하는 계급들을 종교나 부족의 이름으로 하나로 묶기가 수월해졌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실천 속에서 계급적 연대와 의식을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이슬람주의를 분석할 때는 지도자와 평신도들의 관계, 종단과 종파, 분파 내부의 계급적 분할을 봐야 한다. 예컨대, 무슬림형제단 같은 대중적 이슬람주의 운동은 커다란 사회적 모순을 품고 있다. 많은 평신도들은 노동자 계급, 도시 빈민, 하층 중간계급 소속인데,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의 이해관계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한편, 아이시스는 군사 활동을 기반으로 성장한 소수 정예 군사 조직으로, 무슬림형제단과는 또 다르다. 아이시스는 완전히 종파적인 강령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변화를 제기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나 레바논의 헤즈볼라 같은 다른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들이 비록 왜곡된 형태로나마 평범한 사람들의 진정한 변화 염원을 반영하는 것과 달리, 아이시스의 정치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아이시스를 하마스나 헤즈볼라처럼 대할 수 없는 까닭이다.
3) 제국주의
아이시스를 분석할 때 미국의 이라크 개입이 낳은 재앙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은 특히 이라크 점령에 군사적으로 실패하면서 그 패권이 약해졌다. 그 결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같은 지역 강국의 상대적 지위가 높아졌다. 그뿐 아니라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이 독립 국가를 향해 나아가거나 아이시스라는 새로운 세력이 불현듯 등장한 것과 같은 변화도 나타났다.
이를 바로잡겠다고 미국 제국주의가 개입 수준을 늘리는 것은 오히려 아이시스의 명분을 강화하거나 아이시스를 대신할 다른 세력의 등장을 낳을 뿐이다. 게다가 제국주의의 중동 개입은 유럽과 미국에서 무슬림혐오와 인종차별이 자라는 것과 연관돼 있다. 즉, 그 둘은 서로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 아이시스는 이를 이용해 외국인 용병을 끌어들인다.
4) 살아 있는 인간의 주체성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지, 추상적 역사 법칙이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위대한 점은, 사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이론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론을 인간의 주체적 활동과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아랍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최종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적 활동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아이시스가 아닌 대안을 고민하는 데서 중요하다.
종파주의를 키운 미국의 이라크 점령
미국은 2003년부터 이라크를 점령했다. 미국의 강점 하에서 이라크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아이시스의 등장은 바로 이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침공을 준비할 때부터 시아파·수니파·쿠르드족을 이간질하고 그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이라크를 다스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점령 후 미국은 종파와 부족의 인구 수에 따라 관직을 할당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자기 종파와 부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세력이 성장하기에 유리했다.
미국은 종파 간 경쟁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용할 수 있다고 봤지만, 결국 종파 간 경쟁은 미국의 통제를 벗어났다.
미국이 실시한 신자유주의 정책도 종파 간 경쟁이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는 데 일조했다. 미국은 공공부문을 대대적으로 민영화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 토호, 민병대 지도자, 종파주의적 정당 지도자들이 큰 수혜를 입었다. 이들은 그전까지 국가에 속했던 기관들을 인수하거나 약탈해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미국은 이 세력들을 통제하는 데 두고두고 애를 먹었다.
그러나 평범한 이라크인들은 이런 흐름에 거듭거듭 저항했다. 미군 점령 초기부터 점령 반대 운동은 종파간 차이를 넘어 벌어졌다. 2004년 5월 미군 당국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이라크인 다섯 명 중 네 명은 미군 철수를 바랐다. ‘수니파 도시’ 팔루자뿐 아니라 ‘시아파 도시’ 사드르시티와 나자프에서도 무장 저항이 잇따랐다. 2004년 4월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군 제2대대는 팔루자 저항 진압 작전에 반대해 항명하기도 했다.
2004년 11월 미국은 팔루자에서 수천 명을 학살했다. 팔루자 학살에는 저항세력이 종파를 넘어 단결하는 것을 막으려는 노림수도 있었다. 팔루자 학살은 선거를 한 달 남짓 남겨 놓고 일어났고, 수니파 저항세력은 선거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과 손잡은 시아파 정당들은 마침내 ‘시아파의 이익’을 실현할 기회가 왔다며 선거 참여를 호소했다. 점령에 저항하는 시아파 일부는 선거 참여에 비판적이었지만 시아파 최고성직자가 ‘선거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점령을 끝내는 평화적인 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자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 결과 시아파가 주도하는 종파적 정부가 들어선다.
이라크 알카에다의 성장과 미국의 또 다른 이간책
이처럼 시아파 일부가 미군 점령에 부역하기 시작하고 시아파와 수니파가 분열하면서 알카에다 세력이 성장할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는 팔루자가 속한 서부 지역에서 미군을 상대로 전과(戰果)를 올리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알카에다는 매우 종파적이었고 종파간 내전을 부추겼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종파적 규율을 강요하려 들면서, 그 명성은 곧 빛이 바랬다. 정부의 종파적 행태에 치를 떠는 많은 이라크인들은 똑같은 종파적 보복으로 이에 대응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미국은 저항세력과 알카에다 사이의 틈을 노리고 이간질 책략을 부렸다. 일부 부족 지도자들과 협약을 맺어 자금과 훈련을 제공하고 알카에다에 맞서게 했다(‘각성 운동’). 대부분 수니파인 10만 명(‘이라크 아들들’)에게 매달 3백 달러를 지급하면서 알카에다에 맞서 싸우도록 했고, 향후 정식 군인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존의 종파간 갈등 구도가 여전한 가운데 미국이 특정 종파로만 이뤄진 또 다른 세력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라크의 분열은 더 악화됐다.
시아파 주도의 종파적인 이라크 정부는 미군이 수니파에게 무기를 쥐어 주는 것을 위협으로 여겼다. 2009년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아들들’을 강제해산하고 심지어 일부는 재판도 없이 처형해 버렸다. 종파 간 갈등은 더 악화됐다.
이라크 말리키 정권의 처참한 실패
한편, 미군에 협력하며 성장한 수니파 권력자들은 중앙 정부에도 일정한 지분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정부를 이끄는 말리키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2010년 총선에서 말리키는 2위로 밀렸지만, 사법부 내 지지 기반을 이용해 스스로 총리를 연임하고 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자신과 경쟁하는 수니파 정치인들을 탄압했다. 자기 세력 구축을 위해 군대 통솔 체계도 재편했다. 그 과정에서 시아파 민병대의 입지가 커졌고 종파적 폭력이 증가했다.
이처럼 종파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말리키 정권에 대한 커다란 환멸이 곧바로 알카에다의 성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수니파는 처음에는 테러가 아니라 대중 운동으로 정권에 도전했다.
이라크에서는 2012년 말부터 아랍 혁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거리 시위와 광장 점거 운동이 벌어졌고, 여기에 수만 명이 참가했다. 시위대는 수니파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이라크의 봄’).
그러나 말리키 정권은 이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런 환경에서 알카에다가 다시금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된다.
여기에 더해, 아랍 세계 전역의 정세 변화도 알카에다의 성장을 도왔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미국 영향력의 쇠퇴이다. 이라크 점령의 정치적·군사적 실패에 2008년 경제 위기도 미국을 압박했다. 미국은 더는 이라크에 돈을 쏟아부을 처지가 못 됐다. 그래서 미국은 2011년 이라크에서 철군하며 한동안 군사 개입을 꺼렸다.
2011년 아랍 혁명이 터져나온 이후 아랍 세계 전역에서 종파적 선전이 강화된 것도 중요한 변화였다. 걸프해 연안국들의 왕정들은 방송과 인터넷을 시아파 비난 내용으로 채웠다.
단지 선전만이 아니었다. 시리아의 아사드 독재 정권은 권력을 지키려고 혁명을 종파간 내전으로 비틀었다. 시리아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가 자신을 비롯한 알라위파(시아파)를 제거하려 든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사드는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와 이란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란·시리아와 앙숙 관계인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해 연안국들의 왕정들은 시리아 반군 중 종파주의적인 수니파 세력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애초 혁명을 주도했던 시리아의 기층 대중 운동과 무장단체들은 주변화됐다.
아이시스: 게릴라 군사 집단에서 국가로?
시리아는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양국 중앙정부가 약해지면서 두 나라의 국경 구분이 무색해졌다. 2010년만 해도 거의 소멸한 듯이 보였던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는 이런 환경에서 불과 2년 만에 소생하기 시작했다.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는 이라크와 시리아를 오가며 세력을 키웠고 무기와 베테랑 전사들을 확충했다.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를 이끄는 알바그다디는 2013년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 및 세계 지도부와 마찰을 빚었다. 알바그다디가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와 시리아 지부를 일방으로 통합한다고 선언한 것이 계기였다.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는 이름도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로 바꿨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의 봄’ 시위대 50명을 학살한 게 알바그다디에게 기회로 작용한다. 이라크인들의 일부가 무장 투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 말 이라크 말리키 정부가 수니파 정치인을 테러 혐의로 체포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팔루자 지역에서 일어났다. 선거를 앞둔 말리키 정부는 시아파의 단결을 촉구하는 종파적 선동에 열을 올리며 팔루자 시위를 분쇄하겠다고 거듭 천명한다. 2004년의 학살극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에 팔루자 지도자들은 아이시스와 손을 잡는다. 이로써 팔루자는 아이시스가 차지한 첫 이라크 도시가 됐다.
한편, 시리아 반군들은 2013년 3월 라까라는 도시를 차지했다. 라까는 반군이 차지한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도시였고 유일한 주도(州都)였다. 아이시스는 역량을 라까 장악에 집중했다. 수개월에 걸쳐 다른 반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끝에 아이시스는 2014년 1월 라까를 차지했다. 그리고 2014년 6월에는 이라크에서 제2도시 모술을 차지했다.
이처럼 빨리 성장한 결과, 아이시스는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아이시스가 장악한 라까의 인구는 수십만 명이고 모술의 인구는 1백50만~2백만 명이다. 게릴라 군사 집단이 대도시를 통치하는 집단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이시스의 목표는 이슬람 ’국가’이다.
대도시를 통치한다는 과제는 잠재적으로 아이시스에게 커다란 모순을 일으킬 수 있다. 다른 모든 지배자들처럼 아이시스는 주민들을 상대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합해야 한다. 이 점에서 아이시스의 특기인 잔혹 행위는 강점이자 약점이다. 공포 통치는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지만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어렵다.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군사적 어려움도 제기한다. 게릴라전과 달리, 영토를 지키는 통상적 군대는 다양한 무기와 물자를 배치하고, 새로운 병력을 훈련시키고, 다양한 전술을 익혀야 한다. 지금까지 아이시스는 다른 시리아 반군이나 이라크군의 무기를 빼앗아 활용해 왔는데, 이제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아이시스가 자멸할 것이라고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무엇보다 미국의 이라크·시리아 공습이 큰 변수다. 많은 무장세력이 미국의 공습으로부터 보호받으려고 아이시스에 기댄다는 보도가 있다.
반혁명과 개량주의적 이슬람주의의 몰락
아이시스의 부상과 관련해 살펴볼 마지막 요인은 이슬람주의 운동 내 개량주의 경향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과 튀니지의 은나흐다 등 개량주의적 이슬람주의는 아랍 혁명 이후 선거로 집권했다. 그러나 집권 뒤에는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옛 지배계급의 압력 사이에 낀 신세가 됐다.
개량주의적 이슬람주의가 집권한 뒤에도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계속되자 ‘정상적 사회 질서’를 바랐던 자본가 계급과 중간계급은 빠르게 실망했다. 그 결과, 불과 1년 만에 그 정권들은 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이집트에서 엘 시시가 2013년 7월 대통령 무르시를 쫓아낸 것이 대표적이다.
개량주의적 이슬람주의의 실패와 이라크의 특수한 상황이 맞물리면서 아이시스는 더 광범한 잠재적 지원자층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아이시스는 아랍 혁명이 후퇴하는 상황에 대한 잘못됐지만 나름의 설명(‘민주주의는 서구의 악폐일 뿐이고 이슬람 사회를 만드는 것이 대안이다’)과, 좌절과 분노를 표출할 대상(시아파, 그리스도교, ‘불경한 여성’ 등)을 제공하면서 지지자들을 끌어들인다. 이밖에도 ‘테러와의 전쟁’과 경제 위기로 유럽에서 갈수록 인종차별과 무슬림혐오가 심해지는 것도 아이시스 자원자를 늘리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아이시스 같은 세력이 중동과 아랍의 더 광범한 지역에서 번성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성급하다. 아이시스는 특정한 조건의 산물이다. 이라크·시리아 인근 지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그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랍 세계 곳곳에는 저항의 역사와 경험이 풍부하다. 아이시스가 그런 곳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2011년 혁명 이전의 아랍 세계와 이후의 아랍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011년 혁명은 아랍 세계가 국가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면서 누적된 사회·정치적 긴장이 폭발한 것이었지만, 단지 그 전환을 거꾸로 되돌리기 위한 것, 즉 국가자본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모두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이었다.
2011년 혁명이 기존의 구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대중이 그 혁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은 기존 세력들과 조건들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상황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2011년 혁명의 분출은 결코 자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혁명을 터뜨린 것은 살아 있는 인간들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악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집트·바레인·시리아에서 혁명이 터져나오자 하나같이 종파주의에 반대하는 내용과 구호가 넘쳐 났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혁명이 계급적 성격을 가졌던 덕분이다. 아랍 혁명은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노동자·빈민이 지배자들에 맞서 일으킨 혁명이었다. 아이시스를 대신하고 종파주의를 극복할 진정한 잠재력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혁명에 있다.
이 글은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활동가 앤 알렉산더의 논문 ‘ISIS and counter-revolution: towards a Marxist analysis’(International Socialism 145)를 참고해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