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시즘 3일차에 이주노동자에 관한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규직이며 강력한 노조의 울타리로 보호받는 내가 이주노동자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자체가 위선이 아닌가?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나는 막연한 동정심이나 측은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려는 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으로 여기에 왔다고.
그들을 제대로 알고 이해함으로써 한국 전체 노동의 윤곽을 좀 더 뚜렷이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다야 라이 동지와 이길우 지부장님의 발언은, 기대했던 대로 이주노동자의 실상을 경험자의 입장에서 생생히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주노동자의 비율이 70퍼센트를 넘는 건설 부문 노동자여서 일종의 "대표성"도 띠고 있었습니다.
대충 기억을 되살려 봐도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 일당도 2~3만 원 적음. 제대로 된 주거나 생활 공간 없음, 식사 등의 기본 생활에서도 항상 차별 등’.
열악한 노동 환경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참가한 청중조차 놀랄 정도의 수치와 경험담들이었습니다.
국내 노동자가 외국인을 차별·적대시 했고 자신도 그 중심에 있었다는 이길우 지부장님의 회상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후 노조의 파업이 성과를 거두고 임금과 처우가 개선되자 이주노동자를 쫓아낼 이유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통해 본질적인 부분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주", "내국인", "외국인" 같은 차별적 단어가 아닌, "노동자"라는 하나의 큰 범주에서 서로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거하고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지극히 당연한 행위를 노동자들 스스로 분열해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왕 하는 투쟁이라면 외국인, 내국인이 "함께"하는 것이 당연히 더 큰 성과를 낼 것입니다.
이정원 동지의 발언은 그 주제를 더욱 선명히 뒷받침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바라보는 보수적인 시선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여러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률과 일자리 감소는 경제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이주노동자의 증가는 별 관계가 없다는 주장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내국인 노동자가 이주노동자를 배척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투쟁이 벌어졌을 때 만일 이주노동자가 사용자의 편에 서 대체 인력 등으로 투입된다면, 국내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라는 부분은 매우 공감이 갔습니다. 철도도 파업 때 대체 인력의 투입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많았습니다.
굳이 투쟁이 아니더라도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일깨웠습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값싸고 왕성한 노동력이 외국인이므로 국내 노동자로서는 역차별을 가속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도 외국 나가서 일해 봐라. 그 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는 네가 외국인 노동자야. 같은 일을 하는데 부당하게 대우받으면 좋겠어?" 하고 말하는 것이 워크숖에 들어오기 전 내 수준이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에서 좀 더 나아가 "같은 노동자"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실질적인 연대감"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맑시즘이었기에 가능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