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여성주의의 등장과 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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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 조셉 추나라(37)가 2015년 2월 방한해 〈노동자 연대〉 신문 기자들과의 모임에서 한 강의를 녹취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노동자 연대〉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다.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과 여성주의가 전 세계에서 크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부흥은 반자본주의 운동이 떠오르면서 시작됐는데, 특히 최근 몇 년 새 더 강력해진 듯합니다. 인도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한 것에 사람들이 크게 분노해 대규모 운동을 벌인 것이 한 사례입니다. 성추행에 반대해 북미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간 ‘헤픈 여자 옷차림으로 걷기’(SlutWalk) 운동도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배계급 인사들이 저지르는 성추행과 성폭행이 크게 문제가 됐습니다.
게다가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는 ‘야한 문화’(raunch culture)에 대한 반발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야한 문화’는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가 다시 정상 취급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폴댄스(봉춤)를 추는 동아리가 보통의 동아리인 것처럼 여겨지며 대학교에 생겨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저항하는 운동을 반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불리한 점도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 운동은 노동계급 투쟁 수위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둘째, 이 운동은 대학 캠퍼스에 집중돼 있으면서 주류 정치 담론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주의에 반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혐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투쟁하면서도 그들의 사상과 경합을 벌입니다. 이 점에서 린지 저먼과 크리스 하먼 등이 발전시킨 가부장제 이론 비판은 매우 소중한 자산입니다. 우리는 여성 차별이 계급 사회와 밀접히 관련돼 있고, 여성 차별을 근절시키려면 노동계급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여성 차별의 징후들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습니다.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우리를 적대한다고 해서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 차별의 징후에 대항하는 것으로부터 위축되면 안 됩니다.
현재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여성주의는 1960~70년대에 유행한 제2물결 여성주의와 몇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제2물결 여성주의는 운동이 가라앉으면서 두세 진영으로 분열했습니다. 첫째, 철저한 여성주의입니다. 철저한 여성주의는 남성 개인의 가부장적 태도에 초점을 맞추며 분리주의적 태도를 강조합니다. 둘째,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입니다. 이 진영은 분리주의는 거부했지만 영국에서는 노동당으로 유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셋째,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입니다. 영국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는 운동이 가라앉으면서 점점 수세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도 이렇게 분열하고 말 것이라고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포르노나 성노동 같은 오래된 쟁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질 때 제2물결 여성주의 때와 상당히 비슷한 구도로 입장이 갈립니다.
다원주의적
새로운 여성주의의 둘째 특징은 스스로 포괄적이고 다원주의적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종차별, 섹슈얼리티, 장애 같은 쟁점에 개방적이고 민감합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의 셋째 특징은 급진적 버전의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학계에서 새로운 여성주의는 퀴어 이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했습니다. 미셸 푸코가 최초로 발전시킨 퀴어 이론은 ‘섹슈얼리티는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핵심으로 합니다.
‘상호교차성’ 개념도 새로운 여성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이론이 강조하는 바는 각각의 피차별 사회집단은 서로 다른 차별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과 다른 차별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이론은 상당히 허약합니다. 경험 차원에만 머물면서 차별의 양상을 묘사할 뿐 깊이 파고들어 차별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이론을 이해하고 그중 몇몇 쟁점에서는 논쟁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성주의의 부흥과 관련해 중요한 또 다른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적 여성주의의 재등장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리즈 보겔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차별》이 재출판된 것입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30년 전보다 이번에 훨씬 더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번에 나온 개정판에는 데이비드 맥널리와 수 퍼거슨이 북미 지역 사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쓴 흥미로운 서문이 실려 있습니다. 맥널리와 퍼거슨은 리즈 보겔의 연구 결과를 새로운 여성주의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상호교차성 개념을 더해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겔의 저서를 읽어 보면, 보겔의 이론은 오히려 비슷한 때 크리스 하먼이 발전시키고 있던 이론[노동자연대가 펴낸 소책자 《여성 해방과 맑스주의》에서 설명되고 있다]과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이 논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주므로 중요합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은 리즈 보겔의 책에 대한 전반적으로 우호적인(비판도 가미하고 있지만) 긴 서평을 실었습니다.
결론짓겠습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의 부상에 대응하는 과제의 첫 단계는 그들과 연관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투쟁에서 그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들과 토론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운동 안에는 여성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꽤 있을 것입니다.
질의 응답
최근 몇 년 동안 새로운 여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배경, 여성주의의 다른 조류들과 구분되는 특징, 발전 전망 등이 궁금합니다. 또, 새로운 여성주의가 학계의 퀴어 이론 같은 것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의 성장은 1990년대 이래 계속된 사회비평(social critique) 재활성화의 일부라고 봅니다. 포스트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서 성장한 면도 중요합니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이제는 여성 평등을 대체로 달성했다고 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의 성장은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특히 학생들이 겪는 실질적인 성적 희롱·폭력과 차별에 대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새로운 여성주의를 단일하고 일관된 운동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1960~70년대에는 여성주의의 다양한 조류들을 하나로 모아 내는 여성 운동 대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는 그 안에 정치적으로 다종다양한 경향들이 있고, 어떤 경향이 우세한지 알기 힘듭니다. 또, 그 다양한 경향들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모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공통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1960~70년대의 옛 여성주의(old feminism)에는 모두들 반대합니다. 초점을 너무 서구 백인 여성들에게 맞췄다면서 말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가 어떻게 발전할지는 그보다 더 넓은 투쟁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는 급진화가 일어나고 투쟁이 귀환하는 때[1990년대 말] 탄생한 것이므로 사회적 투쟁이 전반적으로 더 발전하면 새로운 여성주의도 더 발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투쟁의 발전이 노동자 투쟁의 전반적 고양을 중심으로 일어난다면, 우리가 새로운 여성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개입하기 훨씬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와 퀴어 이론의 관계는 꽤 복잡합니다. 새로운 여성주의 안에서 논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섹슈얼리티가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도 본다는 점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전통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와 비슷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성역할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재생산할 필요에서 비롯했고, 여기서는 생물학적 속성이 어느 정도는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는 주관적 ‘권력 관계’에 대한 퀴어 이론의 강조도 받아들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는 권력 관계를 더 넒은 사회관계 속에 자리매김 하려는 것에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퀴어 이론에 대해서는 콜린 윌슨이 《인터내셔널 소셜리즘》[132호(2011년 가을)]에 쓴 훌륭한 논문[제목: ‘Queer theory and politics’]이 있습니다.
분리주의적 여성주의는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찾고, 퀴어 이론과 접목된 새로운 여성주의는 성과 여성 차별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이 정치적으로 함의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와 관련해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서 콜린 윌슨과 존 몰리뉴가 논쟁을 벌였던데, 이에 대해서도 논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콜린 윌슨과 존 몰리뉴의 논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존 몰리뉴의 주장에 더 동의합니다. 존 몰리뉴의 글은 원래는 조너선 닐과 낸시 린디스판이 쓴 글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조너선 닐과 낸시 린디스판의 글은 여성 차별을 관념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젠더뿐 아니라 생물학적 성도 연속성이 있는 스펙트럼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현대 과학을 통해 생물학적 성에도 여성과 남성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여러 다른 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젠더가 구성되는 물질적 기초는 분명 있습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이뤄지는 재생산(번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계급 사회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 차별의 물질적 기초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 기초 위에서 어떻게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트랜스젠더 문제 등에도 섬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도 트랜스젠더 문제를 다루는 논문을 실었습니다. 트랜스젠더들도 가족이 조직되는 보통의 형태를 위협하는 존재여서 차별받는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존 몰리뉴가 콜린 윌슨을 비판한 핵심 이유는 윌슨이 조너선 닐과 낸시 린디스판의 주장을 반쯤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여성주의자들 사이에 성에 대해 더 개방적인 쪽과 더 보수적이고 여성을 피해자로만 보는 쪽이 서로 대립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대립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성의 자유로운 표현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섹스에 긍정적인 여성주의’(sex positive feminism)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향은 여성들이 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합니다.
성의 표현과 관련해 영국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쟁이 벌어지는 쟁점은 포르노와 성노동 문제입니다. 최근 포르노를 긍정하는 여성주의자들과 포르노를 반대하는 여성주의자들이 둘 다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포르노를 반대하는 게일 다인스(Gail Dines)라는 여성주의자는 런던에서 여러 토론회도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쟁에 개입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한 편을 들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성의 표현을 찬성한다’며 포르노를 긍정하는 쪽을 편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도덕주의적 대응의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포르노에 대한 가장 강경한 반대론자인 게일 다인스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 정부들에서 성매매 관련 정책 자문으로 일하면서 성 구매 행위를 범죄화하는 입법을 옹호합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이런 정책이 오히려 성매매 여성을 더욱 위험한 처지로 내몰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이 논쟁에서는 양쪽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립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런 논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론적으로 매우 분명해야 하는 동시에, 매우 섬세한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주장을 어떤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제기할지 등을 고민해야 합니다.
통역 천경록 / 녹취 박충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