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 논쟁:
복지 확대를 위해 노동자도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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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정산 결과가 보여 주듯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세제개편의 핵심은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세를 인상하는 것이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연말정산 전수조사 결과를 보니, 연 소득 5천5백만 원 이상은 세금이 늘었고 연소득 3천5백만~ 4천만 원도 절반 이상 세금이 늘었다.
기업에게는 감세를 해 주면서 노동자들의 유리지갑만 턴다는 불만이 들끓자, 정부는 일부를 환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환급하더라도 상당수 노동자가 세금 부담이 늘어나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친자본주의 언론뿐 아니라 온건 진보 언론도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에게도 증세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한겨레〉는 정부의 소득세 개편 방안이 기본적으로 옳다며 여론의 압력 때문에 “소급적용한 것은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대표적 시민단체 참여연대도 정부의 소득세 개편 방안을 지지하며 “이미 징수한 세금을 깎아 주는 것은 …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의당은 연금으로 월 1백67만 원 이상 받는 사람에게 건강보험료를 더 걷는 정부 건강보험료 개편안을 지지한 바 있다. 퇴직 교사와 공무원에게 증세를 하는 방안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도 낼 테니 너도 내놔?
심지어 노동당도 기관지에서 증세 논쟁을 다루면서 여러 필자들이 부자 증세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도 증세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도 증세에 동참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주된 이유 하나는 이를 통해 “나(중간계층)도 낼 테니 너(부자)도 내라는 강력한 대중적 요구”를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이 말을 한 ‘내가만드는복지국가’의 김종명 건강보험하나로팀장은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를 ‘중간계층’의 일부로 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2014년 가계 금융·복지 조사’를 보면 최근 2년 동안 소득 중간층(40~60퍼센트)의 세 부담 증가율이 고소득층(상위 20퍼센트)의 3.1배에 달했다. 2008년 이후 근로소득자의 소득세 유효세율은 0.46퍼센트 높아졌지만 법인세 실효세율은 3.58퍼센트 낮아졌다.
그래서 2008년에는 법인세가 소득세보다 3조 원이나 많았지만 지난해에는 소득세가 법인세보다 5조 원가량 더 많았다. 여기에다 담뱃세 등 간접세 인상까지 포함하면, 재벌 감세로 구멍난 세수를 소득세와 소비세로 메우고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노동자들은 이미 양보를 강요당해 왔다. 그런데도 자본가들은 양보하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할 뿐이다. 일부에서는 “진영논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지배계급은 철저하게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합리적” 정책이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정책 행정가들이나 가질 만한 착각이다.
법인세와 부자 증세만으로는 재원을 다 확보할 수 없으므로 노동자들에게서도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가 세금을 더 내는 것이 비정규직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부자들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고임금인 정규직 노동자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은 좋지 않은 효과를 낼 것이다. 이런 주장은 진정한 계급 분단선을 흐리고 노동계급 내의 차이를 과장해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이간질하는 논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다.
자본가들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도 세금을 더 내라는 논리가 커질수록 저소득 노동자들은 고임금 노동자들이 세금 인상에 반대해 복지가 확대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반대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은 돌아오는 복지 혜택은 별로 없는데도 자신의 세금 부담은 크게 늘어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정한 격차는 계급 내에서가 아니라 계급 사이에 존재한다는 현실을 봐야 한다. 1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만도 5백조 원이 넘는다. 1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은 지난해에만 37조 원 늘었다.
반대로 한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사회보장기여금 포함)은 2007∼2012년 2.3퍼센트 줄었다.
이런 진정한 격차를 줄이고 자본가들에게 세금 부담을 강제하려면 노동자 운동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2013년 철도 투쟁이 박근혜 정부를 뒤흔든 것처럼 노동자 투쟁은 이윤 체제를 뒤흔들 잠재력이 있고 이런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자본가들은 복지에 들어가는 돈을 어떻게든 줄이고 싶어 하고, 이 때문에 유럽 복지국가에서조차 사실상, 고임금 노동자들이 낸 세금으로 저소득 노동자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결과가 빚어졌다. 물론 이런 복지라 하더라도 반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은 복지 확대를 가로막는 진정한 책임을 가리고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좌파라면 부자들의 자산에 세금을 매기는 부유세 도입과 법인세 인상, 소득세 누진율 강화를 주장하며 일관되게 부자 증세를 요구해야 한다. 당연히 부자 증세, 복지 확대를 이룰 진정한 동력인 단결된 노동자 계급 투쟁을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