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을 절망으로 내모는 고교등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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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의 실태 조사 결과, 소문으로만 떠돌던 ‘고교등급제’가 사실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고교등급제를 시행해 온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등은 ‘학력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는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대학의 자율권’ 운운하며 고교등급제와 함께 본고사 부활과 기여입학제도 요구하고 있다.
이들 대학들은 ‘내신 부풀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교등급제를 시행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신 부풀리기’는 특목고나 명문고 등에서 더 많이 벌어졌고, 국영수 등의 주요 과목보다는 예체능 등의 과목에서 더 많이 일어났다.
설혹 ‘내신 부풀리기’가 광범한 일이었다고 해도 현재처럼 수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입시제도와 대학서열이 온존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교등급제가 적용된 것으로 밝혀진 수시 모집의 도입 취지는, 학생을 단순히 성적이 아니라 다양한 특성을 고려하여 뽑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백번 양보해 학력 격차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신입생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면, 서울대처럼 내신에서 과목 석차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교등급제 시행 대학들은 그런 방법 대신 부유층이 많이 사는 강남 출신 학생들을 뽑는 방법을 선택했다.
게다가 고교등급제를 시행해 온 대학들은 내신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내신 비중이 높은 수시 모집을 계속 확대하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 결국 현재는 정원의 거의 절반 가량을 수시 모집으로 뽑고 있다.
또한 ‘MBC 100분토론’에서 한 교사가 밝혔듯이 학생부의 학부모 직업란에 의사, 대기업 부장 등을 적으면 수시 모집의 합격률이 급격히 올라갔다.
이런 점들은 고교등급제 시행 목적이 단순히 학력 차이를 고려한 선발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 대학들은 고교등급제를 시행해 실제로는 기여입학제와 같은 효과를 내려고 했던 것이다.
서울대는 고교등급제를 시행하지는 않았지만, 서울대 총장인 정운찬은 “고교에 엄연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대학들이 오죽 변별력이 없었으면 고교등급을 적용했겠느냐. 대학입시 과정에서 고려 요소로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며 고교등급제를 옹호하고 나섰다.
게다가 국정감사에서는 고교등급제, 대학별본고사, 기여입학제 등 교육부의 ‘3불정책’에 대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의원인 김영숙은 “이렇게 당당한 교육자가 있다는 것은 첩첩산중에 등불이 켜 있는 것과 같다”며 정운찬을 추켜세웠다.
사실, 교육부는 이들 대학을 거들고 있다. 교육부는 말로는 “고교등급제를 절대 허용할 수 없다”면서도 전교조나 교육단체들이 요구한 특별감사를 “대학의 선발 자율권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며 끝내 거부했고, “재발방지 약속만 하면 눈감아 주겠다”며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교육부가 지난 8월 26일 새 대입제도를 발표할 때 이런 상황이 올지 몰랐을 리 없다. 고교등급제는 이미 2000년 이후 여러 대학들이 시도했었고 교육부는 시정명령까지 내린 적이 있다. 또한 면접을 이용해 대학별 본고사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이를 교육부만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내신과 면접을 강화하는 새 대입제도를 발표한 것으로 보아, 겉으로는 수능을 등급화하고 내신 비중을 높임으로써 학생 사이의 경쟁을 줄이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실제로는 “대학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주기 위해 … 변형 논술과 고교등급제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교육부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학력만으로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우익들은 학력 ‘격차’를 강조하면서 대학 입시에서 ‘변별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당 의원인 이주호는 교육과정평가원의 2001년 학업성취도 평가를 가공해 ‘지역간 학교간 학력 격차 심각’이란 보도자료를 내면서 대학들의 고교등급제 시행을 옹호하기도 했다.
“조사의 목적이 지역별, 고교별 학력차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학업성취도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어서 학교간 학력차 비교 자료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교육과정평가원의 비판에도 막무가내였다.
설혹 학교 사이에 학력 격차가 있더라도 고교등급제를 시행할 근거는 될 수 없다. 같은 학교의 학생이라도 얼마든지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고교등급제는 이런 상황을 모두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익들이 이렇게 학력 격차에 집착하며 ‘변별력’을 강조하는 것은 학생들을 시험 성적에 따라 한 줄로 세우겠다는 셈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았으니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높은 점수를 받는 학력이, 학생들 능력의 전부는 아니다. 학생들은 다양한 재능과 잠재력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식이라면 교육 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 고교 교육을 통해 일정한 수준을 달성했느냐 보다도 다른 학생보다 한 문제라도 더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입시 제도 아래에서는 어느 누구도 공교육에 만족하고 안주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시간과 돈이 있다면 누구나 사교육에 투자해 문제풀이 능력을 기르려 할 것이고 이 때문에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절감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학력 격차를 강조하는 우익들은 결국 고교평준화 해체까지 주장한다. 왜냐면 고교평준화가 학력 격차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주호는 KDI연구원이던 지난해에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라는 논문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고교평준화 공격에 앞장섰던 자다.
또한 서울대 총장인 정운찬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시를 부활시켜 평준화를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릴 때 걸러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계층이동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을 왜곡하는 주장이다. 통계에 따르면 초등학생들이 고등학생들보다 더 많은 사교육비를 쓰고 있다. 만약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입시가 부활한다면 초등학생들의 사교육비는 곧바로 입시를 위한 사교육비로 전환할 것이고 이 때문에 득을 보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들일 것이다.
학생들을 학력에 따라 한 줄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학력 이상의 학생들 모두에게 대학 진학의 기회를 줄 때만 현재의 교육 폐해들을 극복할 수 있다.
학생들의 특별한 재능, 소질, 경력 등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을 꺼리고, 대학들이 자신들의 서열을 지키기 위해 ‘학력 격차’에 목을 매는 체제가 계속되는 한 어떤 교육개혁안도 빛 좋은 개살구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을 위한 대학의 ‘자율권’인가
이번 고교등급제 논란에서 보듯이 대학들은 학생선발권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들을 자의적으로 뽑아 왔다. 그런데도 보수 언론들은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무제한적인 자율권을 대학에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시장을 도입해, 대학들에게 학생 선발과 학교 운영에 더 많은 자유를 줘야만 우리 나라 교육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입시 제도를 더욱 경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쓰며 밤늦게까지 문제 풀이 경쟁에 매달려야 하는 학생들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앙일보〉는 “한국 대학은 입시 제도부터 평등주의 일색이다. … 변별력이 없는 학생부와 수능으로 비슷비슷한 성적의 학생을 골라야 하는 현행 대입 제도에 경쟁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우익들이 찬양해마지 않는 미국식 제도조차도 우리 나라만큼 경쟁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의 명문 주립대학의 입학 조건도 상위 12.5퍼센트 안에 들면 된다. 그런데도 이들은 상위 4퍼센트를 1등급으로 하는 수능 시험안조차 경쟁을 없앤다며 게거품을 문다.
현재 우리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너무나 과도한 경쟁에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줄이는 방법은 현재의 대학서열을 완화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
또한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평준화를 주장하면, 우익들은 대학평준화가 대학에서 경쟁을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황당한 주장이다. 대학평준화가 된다 하더라도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노동 시장의 변동에 좌우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체제에서 곧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 사이에 경쟁이 없을 리 없다.
게다가 현재의 대학서열체제라는 불합리한 체제에서 발생하는 경쟁은 줄여야 한다. 명문대간판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에서 좋은 직장을 위해 ‘3류대생’들이 느끼는 경쟁 압력은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고 대학평준화가 대학의 자율권을 뺐는다는 주장도 맞지 않다. 평준화한 대학들은 자신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잠재력을 가진 학생들을 뽑을 수도 있고 교육 내용 구성에서도 자율권을 발휘할 수 있다.
오히려 평준화가 돼야만 진정한 자율권을 발휘할 수 있는데, 우리 나라처럼 대학들의 서열이 명확한 상태에서 대학들에 자율권을 준다는 것은 결국 대학서열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자율권일 뿐이고, 대학들 사이의 경쟁은 더 높은 점수를 딴 학생들을 얻기 위한 경쟁일 수밖에 없다.
주요 ‘명문대’들이 자율권을 얘기하며 늘 함께 하는 얘기가 기여입학제와 본고사 부활이라는 점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대학서열화가 대학 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비판은 일리가 있다. “우수한 고교생들을 까다로운 변별력으로 골라간 우리 대학들의 국제 경쟁력은 정작 초라할 정도다. … 일부 대학들이 학벌주의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우익들이 말하는 “시장의 도입“은 단순히 경쟁의 강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시장의 도입“은 계급 차별을 더욱 분명히 하는 서열화의 강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열체제 강화를 위해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해 준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다수 학생들에게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