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우당의 보안법 폐지안 - 무늬만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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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7일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당론으로 확정하자, 한나라당과 우익들은 친북 활동과 폭동 위협을 어떻게 막을 수 있냐며 일제히 초강경 마녀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열우당의 폐지안이 우익들의 마녀사냥을 받을 만큼 진보적인 것인지 의문이다. 열우당의 폐지안은 사상의 자유를 전면 보장하는 ‘완전 폐지안’이 아니다. 그것은 형법 보완을 통해 국가보안법의 핵심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이전시킨 ‘무늬만 폐지’일 뿐이다.
열우당 의원들조차도 “보안법을 폐지해도 보안법 위반 사범은 개정 형법을 통해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고 해명할 정도다.
보완 형법에 핵심적으로 추가된 조항은 ‘내란목적단체조직죄’다.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고자 폭동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전조의 구별에 의해 처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보안법 3조 ‘반국가단체’ 조항과 흡사하다.
대표적으로 문제가 됐던 국가보안법 7조의 내용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찬양·고무’와 ‘이적표현’를 빌미로 여전히 처벌될 수 있다. “내란목적 단체가 내란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방조범으로 처벌”(천정배)될 수 있는데, ‘도와주는 것’(이적)에는 “표현행위”도 포함된다고 한다.
게다가 국가보안법 7조의 일부인 ‘국가변란 선전·선동죄’는 그 동안 잘 적용되지 않았던 형법 90조 ‘예비·음모·선동·선전’ 조항을 실질적으로 가동하는 것을 통해 그대로 존속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실제로는 폭동에 착수하지 않고 체제변혁을 주장하기만 해도 처벌에서 제외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민주노동당 법제실장 김정진 변호사)
그런데도 적잖은 진보진영 단체들은 열우당의 폐지안에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국가보안법으로 우리 사회 인권과 민주주의를 억압해 왔던 반세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일로 매우 역사적인 결정”이라면서 열우당을 추켜세웠다.
심지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적극적으로 열우당을 변호하면서, 기존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는 모두 다른 법으로 처벌할 수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처벌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다른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면, 같은 행위를 두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도 문제삼기가 어려울 텐데 말이다.
민변의 최근 행보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열우당의 ‘내란죄 보완안’을 두고 “실제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가장 문제된 조항을 유지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던 것과 모순이다.
많은 단체들이 이런 모순과 혼란에 빠져 있는 듯하다. 이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현실로 다가오는 듯 하자, 그 내용보다는 폐지 자체에 더 집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가보안법 폐지의 상징적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분명 1987년 항쟁 이래로 노동자·민중 운동이 꾸준히 싸워온 데다, 사회 저변의 급진화 압력이 반영된 결과다. 이런 급진화 압력 때문에 우익들이 길길이 날뛰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법의 실제 내용을 살펴봐야 한다. 역대 정권들이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킨 핵심 목적은 피억압 대중의 운동과 조직을 탄압함으로써, 운동의 급진화를 억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다른 법으로도 현실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로 그 법에도 똑같이 반대해야 한다.
따라서 열우당이 시도하는 “형법의 국가보안법화”에 분명히 반대해야 한다. 투쟁의 일차적 전선을 한나라당과 우익에 맞춰야 한다는 이유로 열우당 비판을 회피하는 것은 진보진영의 애초 목표였던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를 이루기 위한 투쟁을 전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