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마르크스주의 - 동성애자의 진정한 평등은 여전히 쟁취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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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동성애자들은 국가의 박해를 받았다. 흔히 경찰들은 함정 수사를 통해 남성 동성애자들을 체포했다.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성 지향을 숨겼다.
지난 30년 동안 최악의 법률적 제약과 차별은 종식됐다. 동성애자에 대한 대중의 편견도 많이 완화됐다. 오늘날 주요 TV와 라디오의 연속극은 모두 동성애자들을 우호적으로 묘사한다.
동성애자 해방 운동은 1969년 뉴욕에서 탄생했다. 스톤월 인(Stonewall Inn)이라는 술집에서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을 박해하는 경찰에 저항하며 며칠 동안 싸웠다.
운동은 급속하게 확산됐고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들은 “골방에서 뛰쳐나와” 차별에 반대하며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 성과는 실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평등은 여전히 쟁취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작은 읍이나 마을보다는 대도시에서 동성애자로 살기가 훨씬 더 쉽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폭력 사례도 여전히 많다. 젊은 동성애자들에게 삶은 더욱 힘겹다.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인종 차별주의를 혐오한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광범한 학생 운동 덕분에 그들은 제국주의에 확고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이 젊은 세대에서도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인 동성애공포증은 여전하다.
흔히 두 가지 주장이 등장한다. 종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가끔 구약성서를 인용한다. 거기에는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그 구약성서는 다른 공동체 출신의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행위, 자신의 딸을 노예로 파는 행위, 불경죄를 저지른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행위 등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쓰인 문서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이런 관습들이 무척이나 역겹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 흔한 주장은 동성애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 “자연스럽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인류 역사 내내 아주 다양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일부는 세 가지 성(性)을 인정하고 세번째 성에 특별한 권능을 부여했다. 고대 그리스의 전사들은 여성 아내와 남성 애인을 함께 두었다. 10세기와 11세기의 이슬람 사회는 인간이 맺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찬양했다. 17세기 일본에서는 남성들 사이의 사랑을 예찬하는 책도 있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바람직하다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사회가 바뀌면 이런 것도 바뀐다.
과거에 농민 남성들은 아내 선택의 기준으로 출산 능력과 육체적 힘을 선호했다. 오늘날에는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관념이 훨씬 더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녀의 수를 제한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동물들은 영화를 보지 않고, TV를 보지 않으며, 음악을 감상하지도 않고, 최신 유행에 따라 옷을 입지도 않는다.
성경이나 꾸란은 이런 것들에 대해 할 말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전들은 이런 현대의 발명품들이 등장하기 오래 전에 쓰였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서로 다른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계율을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의 성(sexuality)은 우리가 동물과는 다르다는 사실, 즉 우리는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성을 통해 단순히 종(種)의 재생산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행복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런 가치들이 뜻하는 바도 끊임없이 바뀐다.
정치적으로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동성애자 차별로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인종 차별적 모욕을 전혀 꿈꿔 보지도 않은 젊은이들이 학교나 대학에서 “푸프터[poofter, 동성애자를 공격하는 모욕적인 언사]”라는 말을 써가며 사람들의 품위를 떨어뜨릴 때 이를 기뻐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정답은 우익이다. 자본주의는 노동 대중을 계속 분열시키는 것에 의존한다. 인종 차별, 여성 차별, 민족주의, 동성애 혐오증, 이 모든 것이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미국에서 기독교 우익은 부시를, 이라크 전쟁을, 부자들에 대한 세금 감면을 지지하고 동성애자들의 동등한 권리에는 반대한다. 부시는 결혼을 이성(異性)간의 결합으로 제한하는 새 법을 제정하려 한다.
결혼의 권리는 자본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혼의 권리가 자녀 양육권, 재산 상속권, 연금과 생명보험의 권리, 심지어는 병원과 감옥에서의 면회나 접견권까지도 좌우하기 때문이다.
칠레의 군부가 민선 정부를 타도했을 때 그들은 수천 명의 노동조합 활동가, 원주민, 사회주의자뿐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죽였다.
히틀러의 나찌는 유대인, 집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활동가, 그리고 동성애자 들을 살해했다.
영국 국민당(BNP)과 유럽의 다른 극우파 미치광이들은 동성애자 억압을 부추기고 싶어 안달이다. 우익이 득세할 때마다 동성애자들은 공격받기 쉬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동성애자들은 여전히 억압받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피억압자의 편에 선다. 우리는 인권을 방어하고 신장시키려는 모든 운동을 지지한다.
우리는 또 인간의 다양성과 변화 가능성에 대한 더 폭넓은 인식을 고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사상이 역사에 의해 형성됐다.
인간의 성은 아주 복잡하다. 모든 사회에서 성적 매력과 애정의 편차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이성에만 매력을 느끼고, 일부는 동성에, 다른 사람들은 둘 다에 매력을 느낀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우리의 유전자가 우리의 욕망을 부분적으로 결정하는가? 우리의 감각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바람직함이라는 특수한 측면에 반응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훈련을 받는가?
그런 논쟁은 자체로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 논쟁 자체가 성 지향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타인을 착취하고 억압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보고 불안해하거나 그들을 처벌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관용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차이를 기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