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시리자를 둘러싼 논쟁:
좌파 정부의 장관이 되면 혁명가들의 영향력은 격감한다
〈노동자 연대〉 구독
그리스에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집권하면서 그리스 좌파 안에서 전략·전술을 둘러싼 여러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혁명적 좌파가 시리자 정부에 입각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문제다. 혁명가들이 시리자 정부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시리자 지도부를 왼쪽으로 끌어당기거나(견인론), 적어도 시리자 지도부가 우경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우경화 방지론). 둘째, 장관의 권한으로 혁명가들의 강령을 실행할 수 있다(권력 지렛대론). 셋째, 혁명적 좌파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영향력 확대론).
이런 주장들의 현실 적용 사례는 시리자 내 좌파적 의견그룹 네트워크인 ‘좌파 플랫폼’의 리더 파나기오티스 라파자니스이다. 라파자니스는 시리자 정부의 생산성재건·환경·에너지부 장관을 맡았다. 장관 취임 직후 그는 전임 정부가 시행하던 전력회사 민영화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총리 치프라스의 우경화 행보를 비판하는 좌파적 인물로 종종 언론에 이름이 등장한다. 특히,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리스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례는 생태녹색당(OP)이다. 생태녹색당은 2012년 6월 총선에서 0.88퍼센트밖에 득표하지 못했지만, 2015년 총선에는 시리자와 연합해 국회의원도 한 명 배출하고 장관직도 하나 얻었다.
그래서 많은 좌파의 눈에 시리자 정부 참여는 소규모 단체의 일원으로 자기 사상을 끝까지 지키기도 쉽지 않고, 또 보수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주의자라고 은근히 업신여김 당하며 눈칫밥 먹기 일쑤인 처지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름길
그러나 여러 역사 속 선례와 선현 격인 사회주의자들의 논증을 보면, 이 길은 삼천포로 빠져 심지어 되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길이다.
당장 지난 4개월가량의 경험만 봐도 시리자 정부에 참여하자는 주장의 근거는 박약하다. 첫째, 시리자 좌파는 시리자 정부의 우경화를 막지 못했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시리자 지도부는 계속 우경화했지만, 시리자 좌파는 이를 막지 못했다.
둘째, 시리자 정부의 전반적 후퇴 속에서 당 좌파 소속 장관들의 정책도 대폭 후퇴하거나 동결됐다. 라파자니스 장관이 선언한 민영화 중단도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시리자 지도부의 우경화를 막지 못한 데는 시리자 좌파의 규모가 작다는 이유와 당의 거듭된 좌파 통제 강화로 지도부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워졌다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이유는 시리자 좌파도 좌파 정부 수립 자체를 중요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도부의 행보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집권 전에는 시리자의 집권을 어렵게 할 만한 주장과 행동을 하지 못했고, 집권 후에는 시리자 정부에 부담을 줄 만한 주장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례: 1936년 스페인 카탈루냐
사실, 좌파 정부에 들어가 좌파적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전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때 혁명적 조직들의 경험이 있다.
1936년 2월 스페인에서는 선거를 통해 공산당과 친자본주의 중간계급 정당이 연립한 민중전선 정부가 등장했다. 그전 몇 해 동안 일어난 강력한 계급투쟁 덕분이었다.
그러나 5개월 뒤 민중전선 정부에 맞서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끈 반혁명적 쿠데타가 일어났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무장을 하고 반격에 나섰다. 농민들도 따라나섰다. 내전이 일어났고 스페인 국가는 해체됐다. 많은 지역에서 노동자나 농민의 혁명적 위원회가 들어서, 해체된 국가를 대체했다. 혁명적 위원회들은 파시스트 군대와 싸울 의용군 모집, 식량 배급, 교통, 보건 등의 업무를 처리했다. 노동계급의 지방정부 구실을 했던 것이다.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직접 장교를 선출했고, 경례가 금지됐고, 군사 전략을 투표로 결정했다. 이런 노동자들의 혁명적 활동이 파시스트 쿠데타를 저지할 유일한 동력이었다.
이런 혁명적 운동에서 가장 앞서 나갔던 곳이 바로 카탈루냐였다. 카탈루냐 주정부는 형식적으로는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와해된 상태였다. 카탈루냐의 실질적 권력은 혁명적 아나키즘 경향의 단체이자 카탈루냐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총연맹(CNT)이 보유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의 동의가 없으면 정부의 명령은 시행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은 권력 행사하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카탈루냐 주정부 의장인 루이스 콤파니스가 의장직을 넘겨주겠다는데도 거부했다. 콤파니스와 만난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의 지도자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콤파니스는 카탈루냐 주민과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의 신뢰를 받고 있으며 우리는 그가 의장으로 계속 남기를 바란다.” 1936년 9월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은 카탈루냐 주정부에 참여했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은 투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1936년 7~8월 당원이 네 배로 증가하면서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카탈루냐에서 전국노동조합총연맹 다음으로 큰 조직이 됐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도 1936년 9월 카탈루냐 주정부에 참여했다.
파시스트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수도 마드리드가 프랑코에게 함락되기 직전에야 민중전선 정부에 무기를 공급했고, 이를 지렛대로 해서 스페인 공산당의 영향력이 커졌다. 프랑코의 반혁명만큼이나 노동자들의 혁명적 운동을 두려워 한 친자본주의 정당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공산당은 노동자 투쟁을 관리하려 애썼다. 노동자들의 자발적 의용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옛 군대와 같은 형태의 상비군을 재건했다. 파시스트를 저지할 유일한 힘을 제어하고 자본주의 국가기관들을 부활시키는 조처였다.
혁명이 가장 전진한 카탈루냐 주 수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이 과정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카탈루냐 주정부에 포함된 전국노동조합총연맹 소속 장관들은 처음에는 정부의 명령에 항의하며 사퇴했지만 3주 뒤 정부에 복귀했다. 그 뒤 노동자들과 정부군의 전투가 닷새 동안 계속됐다. 이제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은 노동자들에게 투항하라고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처음에는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을 설득해 노동자들 편에서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이 설득되지 않자 나중에는 자기 당원들에게 전투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트로츠키는 혁명과 개혁 사이에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중간주의’라며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 결과 혁명의 마지막 불씨가 꺼졌고, 결국에는 프랑코의 파시스트가 승리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 국가 분쇄 전에 정부에 입각해서 활동한다는 전략은 1890년대 말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정부에 입각했던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랑은 몇 년 뒤 사회주의를 포기했다.(크리스 하먼, ‘진보-개혁 연립정부는 지속 가능한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배운다’, 《마르크스21》 10호 참조)
물론 현재 그리스 상황은 1930년대 내전 직전의 스페인과 다르다. 군부가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징후도 없고, 국가 부도 위기를 이용하려는 극우의 감정적 거짓 선동이 매우 잘 먹혀, 파시즘이 권력을 잡을 만큼 성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 상황은 좀 더 장기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사례는 아무리 혁명가라도 자본주의 국가가 가하는 압박은 피해갈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혁명가 장관과 자본주의 국가
그 밖에도 역사의 많은 사례를 보면, 심지어 혁명적 인물조차 정부에 입각하면 개혁주의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후퇴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후퇴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질서 유지 기능을 하는 자본주의적 국가의 일부가 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바로 그 과정에서, 한때는 좌파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이제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됐고, 많은 노동자 정당들이 자기 지지 기반인 노동자들을 공격하게 됐다. 현재의 그리스처럼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는 우경화·후퇴 압력은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래서 폴란드 출신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위해 어느 직책을 맡아야 한다면 그에 따르는 위험이나 어려움을 회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일반으로 정부 부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 정당에게는 활동 무대가 될 수 없다.
“부르주아 정부의 성격은 정부 각료 개인들의 성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에서 그 정부가 수행하는 유기적 기능에 달려 있다. … 계급 지배가 지속되는 한 부르주아 정부는 사회주의 정부로 변모할 수 없다.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장관으로 바뀔 뿐이다.
“부르주아 정부에 사회주의자가 입각하는 것은 생각과 달리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국가를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가 사회주의 당을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혁명가는 좌파 정부에 대한 좌파적 야당으로 활동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들이 좌파 정부의 등장에 무관심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좌파 정부의 등장으로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전투성이 고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리자의 집권은 한편으로, 경제 위기와 긴축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줬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시리자는 국내외 운동에 우경화 압력도 끼친다. 예를 들어, 그동안 각국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당론으로써 확고히 반대해 왔던 독일 좌파당이 2월 20일 유럽연합과 시리자 정부의 구제금융 연장 합의를 놓고 내분을 겪었다(당 소속 의원 64명 중 다수 찬성, 10명 기권, 3명 반대). 여기에는 그리스 총리 치프라스가 직접 좌파당에 연락해 지지를 호소한 것이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김종환, ‘혁명가들은 시리자가 후퇴할 때에도 지지해야 하는가’, 〈노동자 연대〉 147호 보충판 참조)
그래서, 좌파 정부가 등장한다고 해서 운동이 필연적으로 전진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적어도 선진적 노동자들이 정부에 독립적으로 투쟁할 때만 운동이 전진할 수 있다. 좌파 정부가 시행할 수 있는 개혁의 수준도 노동자 투쟁에 달려 있다. 개혁을 쟁취하는 데서 결정적인 것은 지도자들의 협상 수완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투쟁의 힘이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개혁주의적 노동자들과 공동으로 투쟁을 벌이며 그 투쟁 속에서 이들이 스스로 좌파 정부에 대한 착각을 깨도록 해야 한다.
이것(즉, 공동전선)이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과 혁명적 반자본주의 좌파연합 안타르시아가 실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맞선 운동이 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안타르시아는 강경 나치 정당인 황금새벽당이 급성장하기 전인 2009년부터 ‘인종차별·파시즘 반대 운동’(KEERFA)이라는 광범한 연대체를 결성해 운동을 조직했다.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 파시즘이 성장할 수 있다는 분석에 근거한 실천이었다. 몇 년 동안의 투쟁 축적은 이후 큰 분출로 이어졌다.
2013년 가을 ‘인종차별·파시즘 반대 운동’은 인구 66만 명의 아테네에서만도 5만 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다른 좌파뿐 아니라 노동조합들(심지어 사회당의 영향력을 받는 노동조합들)도 이 시위를 지지한 덕분이다. 이 대규모 운동의 압력으로 당시 신민당 정부는 황금새벽당 지도자들을 범죄조직 결성 및 운영 혐의로 체포했다. 총리 자신이 황금새벽당을 연립정부에 포함시키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던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뒤로 황금새벽당의 성장세는 주춤했다. (물론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맞서는 운동을 건설하는 것은 여전히 그리스 좌파들의 중요한 과제다.)
이처럼, 그리스 반파시즘 운동 경험은 혁명적 좌파들이 좌파 정부에 입각하지 않고도 정치 지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아쉽게도 시리자와 시리자 좌파는 3월 21일에 열린 대규모 반파시즘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다.
2009년 작고한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좌파 정부들의 경험을 돌아보며 이렇게 주장했다. “혁명가들의 임무는 노동자들이 ‘좌파’ 정부에 대해 갖고 있는 착각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의 부분적·제한적 투쟁들에 모두 개입하고 이를 일반화하고 이끌어야 한다. 설령 이 투쟁들이 좌파 정부의 전략과 충돌한다고 해도 말이다. 요약하자면, 혁명가의 임무는 좌파 정부에 대한 좌파적 야당 세력을 조직하는 것이고, 국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