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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경제 위기의 대안 논쟁:
그리스 민중(국민의 대중)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이 기사를 읽기 전에 “그리스 위기는 ‘복지병’ 때문인가?”를 읽으시오.

그리스가 위기에 처하게 된 초기부터 대안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리스가 유로존과 유럽연합을 탈퇴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가 주요 쟁점의 하나였다. 이른바 ‘그렉시트(Grexit)’ 논쟁이다. 유럽 지배자들이 1월 총선과 7월 5일 국민투표에서 드러난 그리스 대중의 뜻을 완전히 묵살하며 시리자 정부에 후퇴를 강요하는 지금 이 문제는 더 중요해졌다.

우선, 유로존을 지켜야 하고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나가면 끔찍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주장은 노동자들의 긴축 반대 운동에 대응해 지배계급이 내놓은 협박임을 알아야 한다. 특히 그리스 정치가 중요한 기로에 섰을 때 이 협박이 기승을 부렸다. 7월 5일 국민투표 때 유럽의회 의장 마르틴 슐츠가 한 말이 대표적이다. “반대를 선택하면, 자금을 지원받지 못해 의료 시스템이 붕괴하고, 전력 공급이 끊기고, 생필품 수입이 차단되고, … 더는 급여를 받을 수 없게 되고, 전력과 대중교통 등 기초 공공서비스가 중단될 것[이다.]”

이는 공갈이다. 그동안 그리스가 ‘구제’금융이라고 받은 돈 중에 그리스인들의 임금과 연금을 지급하는 데 쓰인 것은 없다는 점에서 거짓말이기도 하다. 오히려 지난 몇 달 동안 시리자 정부는 ‘구제’금융으로 빌린 돈을 갚아야 할지 아니면 연금을 지급해야 할지를 놓고 고심했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은 제국연합(Empire Union)” 7월 15일 그리스 공공부문 총파업. ⓒ사진 출처 그리스 〈노동자 연대〉

유럽연합과 유로존은 고쳐 쓸 수 없는 자본가들의 기구이다

유럽 지배자들이 유로존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그들에게 유로화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로화는 2002년 도입됐는데, 주된 목적은 세계 시장에서 달러와 경쟁할 수 있는 기축통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기축통화는 국제 거래에서 중심적 구실을 하는 통화를 뜻하는데, 미국 지배계급은 달러화라는 기축통화를 가진 덕분에 큰 이득을 누린다. 물론 한계는 있지만, 필요할 때 돈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경제 위기에 대응해 이른바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했는데, 쉽게 말해 돈을 엄청나게 찍어내 시중에 푸는 정책이었다.

어떤 통화가 기축통화 구실을 하려면 그 가치가 보장돼야 한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유럽 지배계급은 극단적인 자유시장주의에 의존해 유로화의 안정성을 지키려 한다. 그래서 유로존에 가입하려면 정부 부채를 GDP(국내총생산)의 60퍼센트로 맞춰야 한다. 가입 조건 자체가 상당한 긴축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재 그리스의 정부 부채는 GDP의 175퍼센트다.

유로화 도입은 유럽연합이라는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일환이자 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유럽연합의 뿌리는 1951년 설립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이다. 이름에서도 풍겨지듯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목적은 세계적 경쟁에 대응해 유럽 자본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었다. 개별 국가보다 더 강력할 국가 연합의 힘으로 말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옛 소련이 몰락한 뒤인 1993년 유럽연합이 창설됐다. 유럽연합 창설의 목적은 주로 서구 강대국들이 옛 동구권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2004년에는 옛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8개 국가가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그 몇 년 뒤에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도 합류했다.

활용론과 폐기론

그와 함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와 전쟁도 확대됐다. 대표 사례가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뒤이은 나토군의 세르비아 폭격이다. 그래서 2012년 방한해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2012’에서 강연한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소티리스 콘토야니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요컨대 유럽연합은 국가도 아니고, … 무역블록도 아닙니다. 그것은 악랄하고 호전적이며 피로 얼룩진 제국주의적 연합입니다.”

유럽연합은 회원국들의 노동자들을 상대로도 전쟁을 벌였다. 유럽연합이 창설되는 과정에서 시장 규제가 완화·폐지돼 노동자 착취가 증대한 것이다. 독일의 경쟁력 강화 비결도 바로 엄청난 노동자 쥐어짜기였다.

요컨대, 유로존과 유럽연합은 진보적이기는커녕 노동자들에게는 유해한 존재다. 유로존과 유럽연합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악독한지는 그리스 국민투표와 3차 구제금융 합의를 전후한 기간에 매우 극명하게 드러났다.

게다가 그리스의 유로존·유럽연합 잔류는 그리스 지배계급의 염원과도 맞닿아 있다. 특히,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은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구축하기 바라는 그리스 지배계급의 염원에 날개를 달아 줬다. 유로화 사용 덕분에 생긴 (발칸반도 화폐들에 견준) 구매력 향상을 이용해 그리스의 은행과 기업들은 발칸반도에서 민영화되는 공기업 등을 헐값에 쓸어모았다.

지금까지 서술한 이유에서 그리스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좌파연합 안타르시아와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긴축을 중단하려면 유로존과 유럽연합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유럽 통합 프로젝트와 국제주의를 혼동하면 안 된다

적잖은 좌파들이 유로존과 유럽연합의 한계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유럽연합으로 결속하는 것이 국민국가로 나뉘어 있는 것보다는 국제주의적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 논리적 결론은 그리스가 유로존과 유럽연합에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탈퇴한다고 해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유럽 통화 연합[이] 해체[되면] … 국제 연대를 위한 노력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장석준, ‘해설’, 《위기·반란·대안》, 책세상, 2013)

“‘그렉시트’를 주장하는 좌파들은 … 자본은 국경을 넘어 성공하고 있지만, 노동자는 일국 노동조합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유럽 좌파들이 고립되고 있다는 그[에티엔 발리바르]의 지적을 새겨들을 필요는 있다.”(원시, ‘그리스 3차 구제금융 굴복과 투항인가, 전술적 후퇴인가’, 〈레디앙〉, 2015.7.15)

이런 주장들은 유럽연합과 국제주의를 혼동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 말미에 한 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잘 보여 주듯이, 국제주의는 노동계급의 반자본주의적 단결을 추구하는 사상과 실천이다(강조는 인용자). 더 나아가 국제 혁명을 지향하는 운동이자 사상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보루인 유로존과 유럽연합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강화시킨다. 유럽 노동자들이 아직 자기 나라가 유로존과 유럽연합을 탈퇴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어도, 유럽연합에 대한 반감은 꽤 크다.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유럽연합 헌법이 부결된 것 등에서 그 반감을 볼 수 있다.

파시스트

유럽연합은 유럽연합 내 노동자들을 경쟁시킬 뿐 아니라 비유럽 출신 이민자들을 배척하며 인종차별을 강화한다. 올해 초 지중해에서 난민선이 침몰해 8백 명이 몰살한 사건은 유럽연합이 얼마나 폐쇄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 이렇게 유럽 지배자들이 강화하는 이민자 배척과 인종차별은 유럽 곳곳에서 파시스트가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있다.

파시스트들과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인종차별 이데올로기와 함께 유럽연합 반대 정서도 이용한다. 이 점은 그리스의 유로존·유럽연합 탈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거가 되고 있다. “영국 보수당조차 유럽연합의 탈퇴를 내건 데서 알 수 있듯 탈퇴 그 자체가 진보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박석삼, ‘유로존 탈퇴 기로에 선 그리스: 현 시기 그리스 좌파운동의 평가’, 《변혁정치》 3호, 2015.6.1)

그러나 극우와 파시스트들이 유럽연합 반대 정서를 이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좌파적 비판과 대안 제시가 더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극우와 파시스트들이 유럽연합 반대 주장과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프랑스 경험이 좌파적 반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보여 준다. 불과 3년 전인 2012년에만 해도 좌파전선과 좌파당이 꽤나 선전하면서 사회당 지지자들을 왼쪽으로 끌어당겼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파시스트 정당인 국민전선만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시리자 전략의 실패를 애써 감싸는 견해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장석준 기획위원은 그리스 3차 구제금융 합의 소식을 다루면서 “세상이 1930년대, 대혼돈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옳게 보고 있다.(장석준, ‘그리스 비극의 끝인가, 인류 비극의 시작인가’, 〈미디어스〉, 2015.7.15) 그러나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시리자는 “유로존 안에 남아서”, “긴축 정책을 폐지”하겠다고 했는데, “그리스 정부는 ‘긴축 정책 폐지’ 전선에서는 참패했”지만, “유로존에 남는다”는 “나름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 또한 “앞으로 3년간 8백억 유로 규모 구제금융을 받아낸 것도 분명한 성과다.”

그러나 시리자 정부는 그리스 자본주의의 이익(“유로존 안에 남기”)을 위해 노동계급의 이익(“긴축 정책 폐지”)을 희생시켰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패배’가 아니라 노동계급을 배신한 것이다.

둘째, 구제금융을 받게 된 것을 성과라고 보는 것도 문제다. ‘구제’금융은 사실 은행들을 구제하는 자금이고 이것이 그리스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구제금융을 갚으려면 노동자들을 쥐어짜야 한다. 좌파라면 마땅히 구제금융을 반대해야 한다.

장석준 기획위원은 긴축을 반대하면서도 시리자 정부가 자본주의 국가 재직자로서 받는 압박 속에서 지지자들의 염원을 배신한 것을 두둔해 입장이 모호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렉시트를 감내하더라도 새 미래를 열어가겠다는 민심의 새 흐름을 ‘투명하게’ 대변할 또 다른 정치 대안이 준비돼야 한다”는 그의 말이 알쏭달쏭하게 다가온다.

유로존 탈퇴 반대론의 정태적·추수적 관점

유로존·유럽연합 탈퇴의 결과가 노동계급에게 불리할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다.

“결국에는 지불 거부에 이은 유로존 탈퇴와 즉각적인 은행 국유화의 경로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경로는 급격한 인플레를 동반하고 생필품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상황에서 대중에게 심대한 고통을 강요한다. 대중에게는 유로화 탈퇴라는 두려움(이 두려움은 현실에 근거한 두려움이다)이 있다. … 라파비차스(그리스 경제학자)나 안타르시아가 말한 ‘진보적 탈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 탈퇴는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대중의 선택이 있기 전에는 실현될 수 없다.”(박석삼, ‘유로존 탈퇴 기로에 선 그리스: 현 시기 그리스 좌파운동의 평가’, 《변혁정치》 3호, 2015.6.1)

“그렉시트와 독자생존의 길 역시 정치적 주장과 입장으로서 일정한 정당성은 있지만 위험한 실험이자 도박이다.”(원영수, ‘격동의 그리스 정세: 반긴축 국민투표와 치프라스의 반전’, 《변혁정치》 6호, 2015.7.15)

근거 없는 문제 제기는 아니다. 유로존 탈퇴는 아직 없었던 일이고 유럽 지배자들의 협박 수준을 보면 그들이 어떤 보복 조처를 취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로존·유럽연합 탈퇴론은 논증 단계는 통과했지만 실증 단계는 아직 통과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유로존·유럽연합 탈퇴 반대론자들은 유로존 안에서 탈출구를 찾으려던 시리자의 전략이 파산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대중 정서

또한, 그리스 ‘대중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근거는 주로 주류 언론의 여론조사인데, 7월 5일 국민투표 과정에서도 나타났듯이 여론조사는 대중 정서를 제대로 보여 주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이런 주장들의 밑바탕에는 정태적이고 추수적인 관점이 있다. 첫째, 대중의 의식을 고정돼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정태적이다. 그러나 투쟁을 통해 대중의 의식은 발전할 수 있고, 때에 따라 그 속도는 좌파의 생각보다 빠를 수 있다. 그리스 대중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반대를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둘째, 현재 그리스 상황에서 “트로이카가 강요하는 긴축안을 경계로 하여 친긴축과 반긴축으로 나뉘어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박석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매우 부족하다. 그 “반긴축 반트로이카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수단까지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중의 평균적 의식을 좇는 것은 추수적이다.

노동자 통제 같은 급진적 요구가 필요하다

유로존·유럽연합 탈퇴는 과연 노동자에게 이로울 것인가? 또, 어떻게 탈퇴할 수 있는가?

노동자 통제 같은 급진적 조처가 필요하다. 7월 초 그리스에서 시행된 예금 인출 제한 사태는 노동자 통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보여 줬다. 유럽중앙은행을 통해 그리스 은행들에 대한 현금 공급을 끊어 생긴 사태이지만, 노동자들이 생필품을 구입하려면 현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7월 5일 국민투표를 앞두고 어느 은행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상황은 일주일 안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기업들이 현금을 대규모로 인출하는 것을 막고 노동자에게 임금과 연금을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해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파업을 해야 하고 노동조합이 은행을 통제해야 합니다.”

또, 아테네 소재 병원 노동자들은 현금 없이 내원한 환자들이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노동조합에 요청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급진적 조처를 그냥 시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조처들을 시행하려면 그만큼 강력한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시리자 전략의 실패로 그리스 노동계급이 다시 한 번 혹독한 공격을 당하는 지금, 운동이 시리자의 실패와 동반 추락하지 않도록 애써야 하고, 이 점에서 혁명적 좌파의 능동적인 구실은 더 중요해졌다.

마지막으로, 국제 연대도 중요하다. 7월 5일 국민투표를 앞두고 세계 곳곳에서 보낸 연대 메시지는 그리스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줬다. 이렇게 그리스 노동자들이 전 세계에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단호한 거부 운동이 있었다. 국회의사당 앞 신타그마 광장에서 벌어진 그리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힘을 얻고 희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주민들도 연대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반대로, 위기에 처한 국가를 연명시키는 것을 더 중시해 국민투표 결과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치프라스의 배신은 그리스 노동자들에게도, 전 세계에서 지지를 보낸 사람들에게도 씁쓸한 실망감만 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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