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에 빠진 베네수엘라,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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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3차 구제금융 협상이 한창이던 지난 7월 초,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9개국을 디폴트 위험이 큰 국가로 분류했다. 베네수엘라도 이 안에 들었는데, 자메이카·쿠바와 함께 그리스 수준의 등급(Caa2)을 받았다. 지난해 ‘기술적 디폴트’에 빠진 아르헨티나(Caa1)보다도 낮은 등급이다.
직접적 원인은 유가 하락이었다. 2010~2013년 배럴당 98달러였던 국제유가가 계속 하락해, 가장낮았던 지난 1월에는 40달러 중반까지 떨어졌고 현재도 지난 몇 년의 절반 수준이다.
석유 수출에 크게 의존해 온 베네수엘라가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균형 재정’을 유지하려면 유가가 배럴당 1백60달러 이상 돼야 한다. 석유 수출 수입이 줄어들면서 외환 보유액에 위기가 닥치자, 베네수엘라는 이자 상환을 위해 금을 담보로 현금을 조달해야 했다.
외환 위기로 볼리바르화(貨)의 가치가 크게 하락했다. 공식 환율은 1볼리바르 당 15센트(약 1백80원)이지만 베네수엘라 국내에 성행하는 달러 암시장에서는 그 1백 분의 1(1백 볼리바르 당 15센트)에 가깝게 거래되는 실정이다.
물가 인상폭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할 듯하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2015년 1월 이후 관련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민간 조사기관들은 베네수엘라의 2015년 상반기 물가 인상률이 2013년(56.2퍼센트)의 갑절인 1백10퍼센트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지난 5월 최저임금을 30퍼센트 인상해 7천3백24 볼리바르(공식 환율로는 시간당 약 4천73원)까지 올렸지만, 물가 인상률을 따라가기엔 크게 부족한지라 실질임금은 오히려 대폭 하락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로 유가가 하락하면서 외채 규모는 5년 만에 갑절로 늘었고, 이 빚의 상당 부분을 시장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셈해 현물(원유)로 상환하면서 외환 수입이 더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졌다.
석유 수출 수입에 의존하던 다른 산업도 사실상 가동 정지 상태가 됐다. 베네수엘라 최초로 노동자 관리로 운영됐다고 하는 알카사 알루미늄 공장은 부품이 없어서 수시로 가동이 중단됐다. 자동차 공장도 원자재 부족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됐다.
식료품 생산 부문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가공에 필요한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2010년 이후로는 식료품 필요량의 80퍼센트 이상을 수입으로 벌충해야 했다.
마두로 정부는 이런 경제적 참상이 민간 자본가들의 조직적 사보타주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를 ‘통치 불능’ 상태처럼 보이게 하려는 우파들의 조직적 행동이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들은 학생과 중간 계급을 동원해 거리 폭동을 일으키고, 생필품 최저가격 정책을 무너뜨리려고 고의적으로 품귀 현상을 조장했다.
부정부패도 심각한 문제다. 경제 위기 이후 적을 때는 20퍼센트, 많을 때는 40퍼센트에 이르는 외화 수입이 유령 회사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이 점만 보면 베네수엘라 체제에 내재한 원인을 놓칠 수 있다. “21세기 사회주의”의 실험장이라 불리던 베네수엘라가 왜 이렇게 경제 위기의 피해를 심각하게 입는지 이해하려면, ‘볼리바르 식 혁명’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볼리바르식 혁명의 성장과 모순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식 혁명’은 우고 차베스가 1998년 대통령으로 당선하면서 시작됐다.
차베스의 대통령 당선은 1989년에 벌어진 대규모 민중 항쟁 ‘카라카소’로 시작된 정치적 격동의 결과였다. ‘카라카소’는 1980년대 내내 계속된 복지 삭감, 노동계급 생활수준 공격, 대량 실업과 민영화, 물가 인상 등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터져나온 것이었다.
‘카라카소’ 이후 베네수엘라 대중은 기성 정치에 대한 엄청난 환멸과 분노를 갖게 됐다. 당시 무명 장교였던 우고 차베스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부상했고, 이후 광범한 선거 동맹을 결성해 대선에 출마·당선했다.
대통령이 된 차베스의 ‘볼리바르식 혁명’은 애초에는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다. 당시 차베스의 슬로건은 “가능한 한 많은 시장, 필요한 만큼 충분한 국가[개입]”이었다. 차베스 정부가 1999년 제정한 새 헌법은 한편으로는 노동자 권리를 옹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등 모순됐다.
2002년 4월 대규모 거리 항쟁으로 우익들의 쿠데타 기도를 좌절시키고, 같은 해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3개월 동안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로 자본가들의 사보타주를 무력화하면서부터 베네수엘라 내 계급 세력 관계는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자본가들의 자신감은 꺾였고, 노동자들은 의식이 크게 고양됐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잡혀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하기 힘들어지고, 이라크 전쟁과 중국 등 신흥공업국들의 고도성장으로 유가가 폭등한 것도 차베스 정부가 운신할 폭을 넓혀 줬다.
노동자들은 부패한 어용 노총 CTV를 대체해 새로운 민주적 노총인 전국노동자연합UNT을 건설했다. 도시 빈민들과 지역사회 활동가들은 전국적으로 1만 6천여 개의 ‘주민자치평의회’를 구성해 새로운 개혁 과제들을 요구하고 때로 직접 추진했다.
차베스도 이 영향으로 급진화했다. 차베스는 민영화됐던 국영 석유 기업 페데베사PDVSA 재국유화를 추진했고,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을 이용해서 민중이 직접 운영하는 대규모 복지 프로젝트 ‘미션’을 설립했다. 그는 이런 과정을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아래로부터의 급진화 때문에 자신감을 잃었지만,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는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였다. 부와 생산수단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손에 있었으며, 각종 개혁이 석유 수출 수입으로 추진된 까닭에 그들의 부는 오히려 더 늘었다.
국가 기구도 문제였다. 차베스 재임 기간에 네 배 가까이 늘어난 국가 관료들은 민중의 통제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종종 개혁에 딴죽을 걸었다. 사사로이 부를 축적하는 데 몰두하는 차베스 지지자를 일컫는 ‘볼리부르게스’(‘볼리바르식 혁명’이 탄생시킨 부르주아)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국가 관료들(과 군부)은,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대중 운동을 통제하고 체제를 ‘정상화’하고자 했다.
차베스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통합사회주의당PSUV을 창당했다. 차베스는 당원이 6백만 명에 이른 이 정당을 이용해 개혁 과제를 추진하고자 했다. 또, 차베스는 특유의 ‘친서민적’ 매력을 발휘해 일요일 TV 프로그램에서 정책을 발표하고 국정을 운영했다.
그러나 이런 행보가 진정한 “노동자·민중의 권력 쟁취”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자체 활동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아쉽게도 차베스는 노동계급의 통제력을 늘리는 것에는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볼리바르 식 혁명’ 내내 임금 노동과 착취라는 경제 체제는 한 번도 도전받지 않았다. 베네수엘라 경제의 중심축이자 ‘미션’의 핵심 재원인 페데베사는 노동자 관리의 예외 대상이었다. 노동자 관리는 일부 직장에서만 소규모로 시행됐고, 그나마도 물자 부족·지원 부족으로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다.
고유가 시기에는 이런 문제점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황과 함께 잠재해 있던 모순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체 무역 수입의 96퍼센트에 이르던 석유 수출 수입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던 경제가 정체 상태로 빠져들었다. 석유산업 이외의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려는 시도도 물자 부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기층 활동가들의 고군분투에도 ‘미션’은 용두사미가 됐다. ‘미션’의 대표 주자인 ‘바리오 아덴트로’(무상의료)는 원자재 부족으로 의약품 생산이 격감하면서 사실상 의료 자문 활동 이상을 할 수 없게 됐다. ‘미션 비비엔다’(무상주택 건설)도 물자 부족으로 애초 목표치의 약 4퍼센트 정도만이 완공됐다. 이미 국가가 식료품 기업으로부터 시장 가격에 제품을 구입해 공급하는 방식으로, 즉 기업의 이윤을 보존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던 ‘미션 메르칼’(빈민들을 위해 생필품을 저가에 공급하는 소매 제도)은 상품 부족으로 상점 구실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됐다.
가장 활발히 운영될 때조차 ‘미션’의 수혜자는 전체 국민의 25퍼센트 안팎이었지만, 경제가 위기로 빠져들면서 그조차도 힘들어졌다. 위기 전에는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던 빈곤률이 41퍼센트까지 올라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차베스 정부는 실질임금 인상을 억제했고, 이에 항의하는 파업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했다. 때로 정부는 UNT의 임금 협상 제의도 거부했다.
차베스가 민중을 저버리고 자본가들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회적 부의 통제권을 자본가들에게 거의 그대로 남겨뒀고, 이런 불행한 일들은 이 계급관계의 대가였다.
세계 자본주의를 따라 베네수엘라 경제가 불황으로 빠지면서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의 여러 부문들 – 민간 자본가들, 페데베사를 비롯한 국영 기업들,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의 안녕을 바라는 국가 기구들 – 이 이윤을 지키기 위해 작동했고, 노동자 관리가 아니라 이들에 의존해 복지 확대를 추구하던 ‘볼리바르 식 혁명’이 교착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진정한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강화해야
마두로가 차베스한테서 계승한 베네수엘라 국가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마두로는 한편에서는 ‘거리의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고난을 극복하자고 호소했지만,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자본가들에게 도전해 그들의 부와 권력을 몰수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마두로 정부가 운영하는 ‘미션 메르칼’은 식료품 가격을 낮게 묶어 두려 했지만, 이윤을 지키려는 식품 가공 기업들의 사보타주로 물자 공급이 어려워지는 일이 잦았다.
베네수엘라 최대 식품 가공 기업 ‘폴라’에서 일하는 UNT 소속 노동자들은 기업 경영진이 물자를 비축해 재고 품귀 현상을 일으키는 것에 항의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지난 6월 점거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마두로 정부는 노동자들이 관리해 식료품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파업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차베스와 마찬가지로 마두로 역시 민중의 생존을 보호하고자 하지만, 대중의 자력 행동을 고무하고 급진적 전략을 채택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마두로 정부는 올해 상반기의 경제 위기에 대한 통계 수치를 발표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기층을 소외시키는 방식이다.
“21세기 사회주의”의 잠재적이지만 진정한 동력인 노동계급 투쟁을 강화하기보다는, 포퓰리즘적 접근을 토대로 자본주의 국가를 이용해 변화를 이루려는 전략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여러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베네수엘라의 국가 부도 가능성을 90퍼센트 이상으로 보고 있을 만큼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속에서, 베네수엘라의 좌파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그런 원칙에 따른 활동과 투쟁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