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임금피크제 저지 투쟁:
임금피크제 수용 전제 한 노정 교섭은 투쟁만 약화시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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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정부의 강한 압박 속에 공공기관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1백 개 기관에 임금피크제가 도입됐다. 한국노총 집행부의 노사정위 복귀가 이런 노조들에 ‘투쟁은 물 건너 갔다’는 신호를 준 셈이다.
임금피크제 도입 기관에서 정년 연장자들은 평균 2~3년 동안 6천~9천여 만원 가량의 임금이 삭감되게 생겼다. 정년 연장자들은 ‘별도 정원’으로 분류돼 별도의 직군에 편성된다. 이는 단일 호봉 체계를 무력화 하는 임금체계 개악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미 성과연봉제, 퇴출제 방안에 대한 내부 검토를 마치고 발표 시점을 저울질 중이다.
게다가 임금피크제 도입 명분으로 내세운 청년 고용도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다.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1백 개 공공기관 신규 채용 규모는 총 1천8백79명에 불과하다. 심지어 36개 공공기관은 임금피크제 대상자가 없다는 이유로 신규채용 인원이 제로(0)다.
노사정위 재개와 공공운수노조의 위험한 대응
정부는 지금 임금피크제 관철에 “탄력이 붙고” 있다며 지방공기업들로 확대하고 있다. 특히 9월 중에 철도공사, 공항공사, 국민연금·건강보험공단 등 대형 공공기관에서도 밀어붙일 계획이다. 이들 기관에서 성공하면 나머지는 손쉽게 ‘정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밀린 것은 단지 정부의 압박이 거셌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조 상층 지도자들의 대응 방식은 커다란 약점을 보여 줬고 투쟁을 약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공공운수노조 집행부의 (대정부) 교섭 중시 정책은 이번에도 커다란 문제를 낳았다. 이들은 노사정위 안에 공공기관 임금피크제에 관한 ‘원포인트 협의체’가 구성되자, 여기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정부는 임금피크제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며 대차게 나왔고, 결국 노사정위 밖에서 실무협의를 하기로 했다.
정부는 그동안 양대노총 공투본이 노정협의를 요구해 온 것을 미끼로 삼아 실무협의를 제안했는데, 이 협의는 임금피크제 수용을 전제한 것이다.
공투본은 이것이 “실리도 명분도 없다”고 비판했지만, 모순적이게도 실무협의에 응하기로 하면서 사실상 임금피크제 수용을 인정한 셈이 됐다.
공공운수노조 조상수 위원장은 직접 이 협의에 참가해 총액인건비 증가, 임금피크제 도입 기관 경영평가 가점 부여 폐지, 무기계약직 임금피크제 미적용 요구, 기존 60세 정년인 기관은 임금피크제 미적용 등의 요구를 제시할 계획이다.
이 방안들은 임금피크제의 폐해를 줄이는 것들이지만,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문을 열어 주면 노조가 요구한 기준들도 점차 후퇴하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다.
이 속에서 당연히 투쟁 건설은 뒷전이 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집행부는 ‘한국노총 노사정위 복귀 상황에서 파업을 하긴 어렵다’는 한국노총 소속 공공부문 노조들의 논리를 추수하며 9월 11일 경고 파업을 취소했다.
공공운수노조 방침은 ‘노사정위 논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개별 합의 거부’인데, 이 때를 전후해 ‘진퇴 여부’를 결정하려는 듯하다. 투쟁을 시작도 하기 전에 퇴각 시점을 저울질하는 것은 산하 노조들에게 ‘투쟁해 봐야 승산 없다’는 인식만 심어줄 뿐이다.
5개의 주요 공기업(철도, 가스, 공항, 지역난방, 공항 공사) 노조 대표자들은 정부가 성과연봉제나 퇴출제 같은 요구를 해 오면 교섭을 중단하고 쟁의 절차를 밟기로 했다. 그런데 이는 임금피크제 문제로는 쟁의를 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기층의 임금피크제 반대를 보여 준 철도노조 대의원대회
지금 투쟁이 불리하게 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층에서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철도와 같은 작업장에서 활동가들이 공공운수노조의 노정 협의를 비판하며 압력을 넣고 기층에서 투쟁을 조직해 가야 한다.
최근 철도노조 서지본은 경영평가 폐지를 전제로 경영평가 성과급을 일자리 확충 재원으로 내놓겠다는 공공운수노조의 제안을 비판하며, “노정교섭에 매달리지 말고 실제 투쟁을 만드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고 옳게 지적했다.
특히 지난 9일 철도노조 대의원대회는 기층 대의원들의 불만이 상당하다는 점을 보여 줬다. 대의원들은 노조 집행부에 ‘사측의 압박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결의를 요구했다.
이날 김영훈 집행부는 교섭 사항 전반을 위원장에게, 쟁의 행위 결정을 중앙위에 위임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대의원들은 이 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철도노조 조합원들은 지난 5월 김영훈 집행부가 근속승진제 폐지에 합의하는 대신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퇴출제를 막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김영훈 집행부는 임금피크제 거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며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의원들은 총액인건비 증액, 신규채용 정원 증원, 별도 직무 반대 등을 요구 사항으로 포함하고, 9월 중 교섭이 결렬되면 쟁의행위 절차를 밟는다는 수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수정안은 교섭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 사실상 협상 결렬을 유도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명시적으로 임금피크제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철도 활동가들은 투쟁 전선이 불리한 상황에서 임금피크제를 완전히 저지하기 어렵다고 본 듯하다. 이는 공공운수노조의 입장과 대응이 기층의 투쟁 건설을 제약하는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쉬움이 있지만, 철도노조 활동가들이 ‘노동개악 및 가짜 정상화 저지 철도노동자 현장투쟁위원회’(가칭 철투위)를 결성해 임금피크제 저지 투쟁에 나서기로 한 것은 매우 반갑다. 한 활동가의 말처럼, 현재 투쟁이 기울었어도 철도에서 저지선을 치고 버티며 다른 노조들에게 투쟁을 호소한다면 투쟁의 축을 형성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하려면, 공공운수노조의 조건부 임금피크제 수용을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공공부문의 투사와 활동가들도 어렵더라도 모두 사태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