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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보육 위기는 전업주부가 아니라 정부 책임

전면 무상보육을 약속했던 박근혜 정부가 결국 보육 정책을 후퇴시키는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내년 7월부터 0~2세 아이들을 둔 비취업모의 보육시설 이용 시간을 하루 6~8시간으로 제한하려고 한다. 박근혜 정부는 취업모의 아이든 비취업모의 아이든 상관 없이 0~5세 영유아라면 최대 12시간 보육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보육료를 지급해 왔었다.(보육시설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양육수당을 지급했다.)

이런 후퇴는 이미 박근혜표 ‘무상보육’이 시작될 때부터 예고된 바였다. 박근혜 정부 들어 보육료와 양육수당의 지급 범위가 ‘전 연령, 전 계층’으로 확대됐다. 지배자들은 미래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협하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의 고용률을 끌어올려 착취를 강화하고자 하는데, 무상보육 확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무상보육’ 대상을 대폭 확대해 놓고는 그에 따른 재정 부담은 지려 하지 않았다.

기업과 부유층에 과세해 재원을 마련하면 어느 한쪽이 희생돼야 할 필요가 없다. ⓒ이미진

가령 박근혜 정부는 2008년에 2조 3천억 원에 그쳤던 보육예산을 2013년에 약 8조 원으로 대폭 늘려 놓고는, 이 대부분을 지방자치단체와 지방교육청에 떠넘겼다. 그 때문에 ‘무상보육’ 시작과 동시에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시도교육청 간에 갈등이 불거졌다. ‘무상보육 디폴트’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렇게 중앙 정부가 재정 부담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에서 ‘무상보육’은 언제든 중단될 위기에 있었다.

우파들은 무상보육의 재원 문제가 불거지자 선별적 지원을 해야 한다며 군불을 땠다. 어린이집 아동학대도 무상보육 때문인 양 비난했다.

그러다 마침내 정부는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계급 전체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이런 맥락에서 여성들에게도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

고약하게도 정부는 무상보육 위기의 책임을 비취업모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비취업모와 취업모 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정부가 재정 부담 책임을 방기해 생긴 무상보육 위기에 대한 책임을 부당하게 떠넘기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것은 여성들이 육아 부담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경력 단절을 겪는 현실에 대한 책임 회피이기도 하다. 여전히 여성의 취업을 가로막는 압도적 요인은 육아 부담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뒤로한 채 정부가 전업주부들을 ‘놀면서 애도 안 보는 사람’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전업주부들 사이에서는 “누가 전업맘이 되고 싶어서 됐냐”는 얘기가 나온다.

취업모를 위하는 것인 양 하지만, 이번 개악은 취업모들의 보육시설 이용률도 낮추는 효과를 낼 것이다. 개악안대로 하면 취업 사실을 증명해야 전일제 보육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이런 증명이 어려운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상당하다.

‘0~2세 영아는 어머니가 키워야 한다’거나 ‘아이들에게 장시간 어린이집 보육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등 ‘보육 전담자는 여성’이라는 차별적 인식을 부추기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사실 이런 주장은 보육을 지원해(턱없이 부족하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늘리겠다는 정부의 목표와도 모순되는 것이다. 여성의 고용률을 늘리겠다면서도 이를 위한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누리과정 예산 떠넘기기

정부는 3~5세 대상 무상보육(누리과정) 예산을 교육청이 부담하도록 하는 시행령 개정안도 입법예고했다. 정부는 이미 무상보육 예산 전액을 교육청의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부담하도록 떠넘겨 왔다. 이를 아예 시행령으로 규정해 버리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시도교육청은 반발하고 있다.

여기서도 정부는 갈등을 부추겨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이미 누리과정 예산을 시도교육청으로 떠넘기는 바람에 초·중·고등학교의 운영비가 삭감돼 전기세, 수도세, 난방비 등을 줄이는 실정인데, 영유아 ‘동생들’을 위해서 초·중·고 학생들이 더 양보하라는 식이다.

그러나 반드시 어느 한 쪽이 희생돼야 할 이유는 없다. 재원이 없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재원은 대기업과 부유층에 과세해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한사코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기업주의 이윤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다.

따라서 여성운동과 노동자 운동은 보육서비스 축소 움직임에 따른 정부와 친사용자 언론들의 이간질 시도에 반대하며, 기업과 부유층에게 증세해 보육서비스의 보편적 질 향상을 이룰 것을 요구해야 한다.

보육 공공성 강화해야

부자 증세를 통해 재원을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보육 지원 방식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2000년대 동안 한국의 보육서비스 규모와 보육에 대한 정부 지출은 증가했다. 그 결과 2012년 현재 한국의 영유아 74퍼센트가 보육시설이나 유치원을 이용한다. 이는 OECD 다른 국가와 비교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공공 보육서비스는 이중의 굴레에 고통받는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핵심적이다. ⓒ이미진

그러나 한국의 보육서비스는 민간 시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보육시설은 1990년 1천9백19개에서 2013년 4만 3천7백70개로 크게 늘었지만, 늘어난 보육시설의 대부분은 민간 어린이집과 가정 어린이집이었다. 반면, 2013년 현재 국공립 보육시설 비율은 고작 5퍼센트대로 지난 10년 동안 거의 변함이 없었다. 출산율과 여성의 고용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보육서비스를 확대하면서도 비용은 가능한 적게 지출하고자 한 정부 입장에서는 이런 시장화 전략이 안성맞춤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정부는 민간 보육시설 설립 요건을 완화해 진입 장벽을 낮추는 한편, 서비스 이용자에게는 돈을 주고 민간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이런 방식은 어느 정도 국가의 재정 부담을 증가시키긴 하지만, 국가가 책임지고 공급을 확대하는 방식(국공립 보육시설 설립)보다는 훨씬 저렴하다.

노동계급 가정의 처지에서 보면, 국가가 돈으로 보육을 지원하는 방식은 아무런 지원이 없는 것보다는 낫기는 하다. 그러나 보육을 제공하는 주체가 민간(시장)이다 보니 문제가 많았다. 민간 보육시설 운영이 이윤 추구에 종속돼 보육의 질을 보장할 수 없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질낮은 밥·간식을 제공하거나, 유아를 허위로 신고해 정부 보육료만 챙기거나 특별활동비 명목으로 추가 비용을 청구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보육의 질은 보육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직결돼 있는데, 민간 보육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왔다.

지난 10년간 정부 지원이 늘고,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비율은 크게 늘었지만 여전히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없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이유다.

박근혜 정부는 ‘공공형 어린이집’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며 생색내지만, 공공형 어린이집은 이름만 ‘공공형’일 뿐 국가 보조금을 이용해 이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동안 여성운동과 노동자 운동은 보육 시장화 정책을 중단하고 국가 책임성을 훨씬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 국공립 보육시설 대폭 확충, 자치단체의 시설 직접 운영·보육교사 직고용 등 국가가 책임지고 질 좋은 보육서비스를 제공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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