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여성 혐오는 남성의 지배 전략이 아닌 차별적 체제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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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성운동 안팎에서는 이른바 여성 혐오가 지속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다.
문제로 지적돼 온 여성 혐오 발언들은 주로 인터넷 상에서 게시글, 댓글 형태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모욕, 조롱, 멸시 발언들이다. 단순히 여성차별적 의식을 드러내는 수준이 아니라, 혐오와 적대감에 기초해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공격을 찬양, 고무,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매우 역겨운 표현들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김치녀’(경제력이 없으면서 부모나 남자친구 등의 지갑에 의존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 ‘삼일한’(여자는 3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 ‘보슬아치’(여자인 것이 벼슬인 양 행동하는 것을 여성의 성기에 빗댄 말)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는 최근의 이런 ‘여성 혐오 현상’을 다루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정희진 씨(이하 모든 필자에 존칭 생략)를 비롯해 여성학 연구자들과 성소수자 연구자, 인권운동가 여섯 명이 필자로 참여했다. 일부는 여성 혐오를, 다른 일부는 성소수자 혐오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필자들은 각각 초점을 달리하며 여성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의 문제점과 원인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내 놓고 있다.
먼저, 윤보라는 여성 혐오 발언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몇 가지 ‘나쁜 여성’ 유형에 끼워맞춰 놓고 매도하는지를 잘 폭로한다. 한국 여성은 “극단적 개념 상실, 이기주의, 공동체 의식 부재, 쾌락과 허영에 환장하고, 남자와 사회공동체를 이용해 개인적 이득만 챙기려는 몰염치”한 자로 그려진다. 윤보라는 이런 매도가 신자유주의하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고도 지적한다.
익명성에 힘입어 인터넷 상에 우익적·반동적 말들이 오가는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여성 혐오 발언들은 ‘역차별’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기적’이라는 표상의 핵심은 여성들이 각종 ‘우대 정책’을 등에 업고 남성의 몫으로 배정된 지분을 앗아간다는 설정이다.” 이제 더는 차별이 없는데도 여성들이 권리와 특혜를 누리는 바람에 남성들이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군 가산점 폐지가 이런 ‘피해의식’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이에 따라 ‘여성부’와 페미니스트들은 ‘악의축’이 됐다.
한국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 동안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문제제기와 노력에 힘입어 호주제 폐지 등 법적·제도적 차별이 많이 개선됐다. 오늘날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높은 비율로 대학에 진학하고, 노동시장에 대거 진출해 노동력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 일부 여성들은 법관이나 국회의원, CEO가 되는가 하면, 대통령도 여성이다. 그래서 일부 여성들의 처지는 명백히 다수 남성 노동자들의 처지보다 낫다.
그러나 다수 여성들은 여전히 체계적인 차별에 시달린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특히 심각한 수준이다. 육아 부담으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 현상도 뚜렷하다. 경제 위기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 한층의 저임금·불안정 일자리를 강요하고 있다. 일부 남성들의 ‘역차별’ 주장은 일부 여성들의 성공 이면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런 여성차별의 현실을 보지 않는 것이다.
군 가산점 폐지를 근거로 여성을 공격하는 것도 가당치 않은 주장이다. 물론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국가에 의해 부당하게 동원된 남성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병역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지 여성의 책임이 아니다.
‘여성 혐오 현상’, 왜?
상황이 이런데도 최근 몇 년간 온라인 상의 여성 혐오 발언이 늘어난 이유는 뭘까.
여성차별을 아로새기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차별적 의식을 받아들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에 필요한 노동력 재생산 임무를 노동계급 가족(여성)에 떠넘긴다.지배자들은 이런 임무를 강요하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고 온갖 차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자본주의의 소외 때문에 체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불만과 분노는 종종 계급 내의 다른 이들을 향한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의 혐오 발언은 특히 깊어지는 경제 위기와 청년 실업, 그것이 낳은 좌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경제 위기와 청년 실업의 영향은 여성들에게도 고스란히 미치고 있는데도, 일부 보수적 남성들이 ‘이제 여성 상위시대가 됐다’는 과장된 인식 속에서 여성에게 엉뚱한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여성 혐오를 다룬 저자들은 경제 위기와 실업이 낳은 효과를 한 번씩 언급은 하면서도 근본 원인은 다른 데서 찾는 듯하다.
가령 윤보라는 “최근의 여성 혐오 현상이 높은 청년 실업률이나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의한 남성의 좌절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은 섣부른 단정”이라고 본다. 오히려 여성 혐오를 “여성의 주체성을 삭제하려는 작업”, “주체의 위치에 서고자 한 여성들을 저지하는 [남성들의] 투쟁”과 연관시킨다. 2008년 촛불항쟁을 계기로 여성들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상황에서 이런 작업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임옥희는 정신분석학을 사용해, 여성은 남성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존재이므로 원초적으로 남성은 여성을 두려워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또 정희진은 “여성 혐오 발화는 가부장제의 일상”이라고 보고, ‘남성들의 언어’에 의해 여성들이 만들어져 왔음을 강조한다. 시우는 여성 혐오가 남성 간의 유대와 지배적 위치 유지·공유를 위해 필요해진다고 주장한다.
즉, 각각 내용은 다르지만 저자들은 대체로 여성 혐오 현상을 남성들의 공통된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필요·전략과 연관시킨다. 물론 여성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자들이 거의 다 남성이고 여성에 대한 끔찍한 편견과 비하, 적대를 드러내는 걸 보면, 여성 혐오가 근본에서 성 적대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표면적인 현상 설명은 될 수 있어도 구체적인 현실에 기초한 분석은 못 된다.
이런 관점이 남성을 단일한 이해관계를 공유한 집단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필자들은 여성을 단일한 집단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모순적이게도 남성은 단일한 집단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남성 역시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남성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 때문에 자본가·국가관료의 삶과 노동계급 남성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국가관료는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지만 노동계급 남성은 자신(과 여성)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성을 체계적으로 차별함으로써 이득을 누리는 장본인도 소수의 남성(과 소수 여성)들이다.
여성차별이 체계적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남성 대부분이 여성차별적 의식을 어느 정도씩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더 적극적인 의미의 ‘혐오와 적대’를 드러내는 남성은 소수라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나아가 혐오와 적대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들은 더 적다.)
여성 혐오자들이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 세계를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유의미하게 세를 확대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 보수적 성향의 언론들조차 혐오 발언을 부정적 늬앙스로 보도한다는 점, 혐오 발언을 한 연예인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는 점 등은 결코 여성 혐오 발언이 대중한테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음을 방증한다.(〈조선비즈〉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더라도 20대에서 ‘일베’에 공감한다고 답한 사람은 8.6퍼센트뿐이었다.)
변화
여성 혐오를 다룬 저자들이 대체로 한국사회 전반에 여성 혐오가 퍼져 있다고 전제·암시한다. 그러나 사실 온라인 상의 혐오 발언이 늘어난 시기인 2000년대 동안에도 남녀 대중의 의식은 전반적으로 발전하는 추세였다. 지난 30년 동안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꾸준히 확대돼 왔는데, 이런 물질적 현실의 변화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의식과 개별적 관계들에 영향을 미쳤다. 임금노동을 하면서 여성들은 주체적 권리와 필요, 욕구를 지닌 존재임을 자각했다. 그 결과 여자는 집에서 아이와 남편의 뒷바라지나 해야 한다는 전통적 여성관은 약화해 왔고, 개별적 관계도 평등지향적인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가령 통계청의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가사분담실태조사에 따르면, ‘부인이 가사를 주도하는 경우’는 2008년 89.4퍼센트, 2010년 87.4퍼센트, 2012년 80.5퍼센트였고, ‘부인이 전적으로 가사를 책임지는 경우’는 각각 33.4퍼센트, 31.2퍼센트, 24.4퍼센트로 소폭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여전히 가사의 많은 부분을 여성이 맡고 있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로 남성이 가사를 분담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인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여성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윤보라는 2008년 촛불항쟁을 계기로 여성이 정치적 주체가 됐다고 분석하지만, 여성들은 노동계급에 편입되기 시작한 자본주의 초기부터 언제나 저항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런 투쟁의 경험은 여성과 남성 노동자 모두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사람들의 의식은 불균등하고 한 사람의 의식도 모순돼 있다. 의식이 단선적으로 또는 자동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여성차별을 체계적으로 지속함으로써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의식 발전에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의 변화와 함께 대중의 의식이 변화해 왔다는 사실은 사태를 종합적으로 봐야 할 필요성을 보여 준다. 몇몇 인터넷상에서의 악성 저질 발언들이 대중 의식의 표본이라고 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균형 있게 종합적으로 보지 않으면, 오늘날 여성들이 수세에 몰려 있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사이의 단결은 요원하다는 인식을 강화시킬 수 있다. 여성 혐오를 다룬 이 책의 저자들은 남성집단이 단일하다는 가정으로 말미암아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균형있게 분석하고 있지 못하다.
여성 혐오적 발언과 표현들은 우리가 여전히 지독하게도 차별적인 체제에 살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또한 오늘날 여러 법제도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해방은 쟁취해야 할 과제라는 점을 보여 준다. 여성차별과 천대는 (남성 일반의 지배욕이 아니라) 자본주의 가족제도와 착취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의 필요 때문에 여성차별 이데올로기는 체계적으로 부추겨진다. “벌거벗은 말들”에 맞서려면 그것을 재생산하는 원천인 차별적 체제에도 맞서야 하는 이유다.
요컨대, 이 책은 최근의 여성 혐오 현상이 어떤 방식으로 벌어지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이런 현상이 왜 벌어지는지,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천대와 차별은 어디서 비롯하는지에 대해서는 유용한 분석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성소수자 혐오의 정치적 배경
이 책에는 성소수자 혐오와 관련해서도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먼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운영위원이자 《무지개 속 적색: 성소수자 해방과 사회변혁》(책갈피)의 옮긴이인 나라는 최근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성장한 과정과 그 배경, 그리고 이에 맞선 성소수자 운동의 대응에 대해 짧은 글이지만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특히 나라는 한국의 성소수자 반대 운동의 성장을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고 복지와 노동조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과 연결시키고 소수자 속죄양 삼기가 결국 사회 전체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프로젝트임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나라는 한국에서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박근혜 정부의 핵심 지지 기반이고, 정권 실세들 가운데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성소수자 반대 운동과 연결돼” 있음을 폭로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성소수자 반대 운동은 행동주의를 강화해 왔고, 국가기관은 공공연히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 왔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 운동은 최근의 성소수자 혐오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나라는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이 이런 혐오에 대응해 나가면서 성장했고, 진보진영 내 연대도 확대되는 등 성과도 있었다는 점을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한편, ‘트렌스/젠더/퀴어연구소’의 루인의 글은 주로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운동 내의 트렌스젠더, 바이섹슈얼에 대한 편견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루인은 여성운동 내에서 트렌스젠더여성이 “인공적인 존재”, “여성성을 강화”하는 부적절한 존재로 여겨져 왔음을 비판하고, ‘자연적 몸/젠더’와 ‘인공적 몸/젠더’라는 이분법과 여성을 “단일하고 동질적 범주로” 보는 관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루인의 비판에 공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후기구조주의적 페미니즘의 한계
한편, 루인의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후기구조주의의 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정희진의 글에서도 묻어난다.
포스트모더니즘적·후기구조주의적 페미니즘은 ‘여성범주 자체를 해체’하고 여성이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여성을 생물학적, 경험적, 정치적으로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으로 간주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했다. 이 정치에 따르면, 같은 여성 내에서도 성·인종·계급·장애·성지향·민족·직업 등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후기구조주의적 페미니즘이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정체성 정치는 루인이 든 사례와 같이 트렌스젠더처럼 ‘원래 여성의 몸이 아닌 여성’에 대한 부당한 편견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성이 모두 다 다르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가 억압에 맞서 싸우기에 효과적인 사상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차이의 정치’에서는 모든 억압이 개인마다 다르고 상대적이다. 물론 개인들이 겪는 차별의 구체적인 양상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억압을 없애려면 억압을 묘사하고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억압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는 억압을 착취적 사회구조와 분리시키고 개별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총체성을 거부하고 어떤 문제를 단일한 원인과 구조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 불확실성과 불확정성, 현실의 다양하고 파편적인 특징들을 강조한다.
이렇게 총체성을 거부하는 관점은 억압의 물질적 기초를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억압에 맞서 효과적인 투쟁 전략을 세울 수 없다. 여성차별과 성소수자 차별은 노동력 재생산 임무를 개별 가족에 떠넘기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는 자본주의 필요 때문에 유지된다. 따라서 차별을 없애려면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를 공격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계급은 여러 다른 차별 중 하나가 아니다. 계급은 개인들이 억압의 경험이 다를지라도 계급을 토대로 단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다른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적·후기구조주의적 페미니즘은 ‘여성은 만들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애초에 ‘여성’을 ‘여성’이라고 구분할 만한 본질적 특징이란 없다고 보고, 남/여 구별과 범주화를 완전히 해체해 버린다. 이 관점에 따르면 성기와 같은 신체적 차이도 남/여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관점은 구별과 범주화 자체가 차별을 낳는다고 보는 듯하다. 정희진은 “인간을 성sex을 기준으로 구분gender해야만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가 고정된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이를 강요하는 것은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 사이에 신체 자체가 다르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지 구별 자체가 아니다. 구별 자체가 차별을 낳는다고 보는 관점은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이고, 자본주의에서 여성차별의 물질적 기초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