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전략 부재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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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신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교양인)이 최근 나왔다.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대중화됐지만, 근래에는 페미니즘의 일부 과도함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윤석열 정부하에서 성평등 정책도 후퇴하는 상황이다. 페미니즘 내 균열도 커졌다. 정희진은 이런 상황에 불안감을 드러내며 성차별을 부정하는 주장들을 비판하고 페미니즘 내부도 겨냥해 논쟁을 제기한다.
저자는 옳게도 성소수자나 난민 반대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을 기본적인 사회 정의에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주의가 진짜 여성과 가짜 여성을 구별하고 배제에 앞장선다면, 그런 여성주의가 왜 필요할까” 하고 묻는다. 일부 페미니스트의 ‘난민 반대’에도 “자본주의의 절대 지배 속에서 누가 더 약자이고 더 고통받는가를 경쟁하는 비극의 정치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난민과 성폭력을 연결하는 사고는 무지 혹은 의도된 오식(誤識)”이라며 “서구가 비서구 사회의 야만성을 부각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성의 ‘열악한’ 인권 이미지를 활용해 왔음”을 지적하는데, 맞는 지적이다.
‘피해자 중심주의’ 비판
정희진은 ‘피해자 중심주의’ 논리도 비판한다.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에서 여성의 성폭력 피해가 제대로 인정받기 힘든 상황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나왔지만,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런 현실을 바꾸는 개념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저자는 여성이 단일한 경험을 하는 집단이 아니고 여성의 경험과 인식은 각자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피해를 “상황”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여기며 피해자 정체성으로 여성운동을 하는 것에 난점이 있다고 본다. 여성의 경험이 다 다른데, 피해자 중심주의는 규범적 피해자 상에 근거하기에, 그 논리는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본다.
저자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 개념에 담긴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적’이라고 인정받기 힘든데, 피해자 정체성에 기반한 논리를 펼치는 것으로는 페미니즘이 전진하기 힘들다고 보아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듯하다.
“여성의 말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장이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에서는 수용되기 힘든 반면, 남성들 사이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는 상황을 의식하는 것이다.
정희진은 2005년에 낸 《페미니즘의 도전》에서도 이 같은 견해를 밝힌 바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 중심주의 논리가 더 힘을 얻는 듯한 상황에 우려를 나타낸다.
그런데 ‘피해자 중심주의’ 논리에 담긴 주관주의를 비판하지 않고서는 이 개념이 낳는 문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고 대안 제시도 힘들 것이다.
한국의 페미니즘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협소한 법률의 성폭력 규정과 보수적 인식에 반발해 등장했다. 하지만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의 가해자 명단 공개 이후 널리 확산된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건의 객관적 실체와 피해 호소 여성의 인식을 구분하지 않고, 해당 여성의 인식과 감정을 중심으로 성폭력을 판단했다. 이렇게 성폭력 개념이 주관주의적이게 되면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성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논리로 사용돼 왔고, 그 결과 많은 혼란을 낳고 갈등을 키워 왔다.
성폭력 사건에서 물증만이 아니라 여성의 진술도 증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피해 호소를 진중하게 경청해야 한다. 하지만 구체적 사실관계에 대한 면밀한 조사 없이 피해 호소만으로 성폭력이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 여성의 피해 호소가 거짓이거나 과장됐을 경우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키우게 된다. 2000년대 들어 피해자 중심주의가 여성운동과 좌파들 사이에 널리 수용되면서, 실제로 많은 갈등과 분열이 일어났다. 피해자 중심주의-2차 가해 개념을 악용해 단체나 개인을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여성의 피해 호소를 무조건 진실로 간주하는 논리는 우파에 이용되기도 쉽다. 지난 대선에서 우파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워, 사건의 실체가 불분명한 ‘박원순 사건’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했다. 여성의 구조적 불평등을 부정하는 우파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무기로 사용한 것은 위선의 극치였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를 수용한 페미니스트들은 혼란에 빠지거나 혼란을 부추겼다.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한계
정희진은 페미니즘이 정체성 정치를 극복해야 한다고 여긴다. 여성이 단일한 경험을 하지 않는다며 여성 간 차이를 강조하고, 젠더가 “계급, 인종, 연령, 지역 등 다른 사회 모순과 결합”돼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는 페미니즘이 남녀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여러 형태의 차별을 인식해야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정희진은 여성 차별이 계급과 인종 차별 등과 결합된다고 할 뿐, 상이한 형태의 차별이 왜, 어떻게 결합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여성 차별의 근원과 차별이 유지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기에 차별을 없앨 수 있는 전략도 제시하지 못한다.
정희진은 성별 환원론에는 비판적이지만,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은 “계승”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권력관계”라고 본다. 남성 내부에 계급적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남성은 여성 지배에서 같은 이해관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정희진의 책 어디에도 남성이 왜 그런 권력을 갖게 됐는지, 자본주의에서 그것은 어떻게 유지되는지, 남성 간 현격한 계급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연대할 수 있다면, 그 기초는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냥 남성이 권력을 가졌다고 간주하며 ‘남성 문화’와 ‘남성 언어’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지 묘사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은 초역사적 개념으로, 여성 차별이 인류 역사의 보편적 특징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실제 인류 역사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인류 역사 대부분을 이루는 무계급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이 없었다. 이는 많은 인류학과 고고학 연구가 입증한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언제나 지배한다는 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이 변화해 온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정희진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을 수용해 남성 지배와 권력 관계가 곳곳에 있다고 보는데, 이런 사상은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보지 않고 다원적인 것으로 본다. 사회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집단적 주체는 없고, 개개인들의 국지적 실천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정희진의 책에서는 정체성 정치를 대체하는 해방의 전략은 전혀 제시되지 못한다.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은 광범한 사회 변화를 위한 투쟁의 일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고를 바꾸는 것에 국한된다.
정희진은 담론을 중심으로 차별을 분석하는데, 이런 접근법은 차별이 생겨나는 원인을 이해하는 데는 난점이 있다. 관념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기초가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 차별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와 특히 가족제도에 물질적 기초가 있다. 가족제도는 자본주의에서 착취가 지속되는 데 중요한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을 한다. 보수적 성 관념은 지배계급이 가족제도를 유지하고 대중을 분열시켜 지배하고자 퍼뜨리는 것이다.
정희진은 많은 사회 이론처럼 계급을 여러 불평등의 하나로 여길 뿐,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적 사회관계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계급이 각종 차별이 뿌리 내린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지배계급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계급투쟁의 수준이 낮은 시기에 노동계급의 힘은 많은 사람에게 인식되기 힘들다. 하지만 혁명적 투쟁이 분출하는 시기에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권력에 도전하며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거듭 보여 줬다. 계급을 자본주의 사회 분석의 핵심에 놓지 않으면 차별을 없앨 수 있는 전략을 찾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