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단축 논의에서 임금·노동조건 문제를 뭉개선 안 된다
〈노동자 연대〉 구독
정부와 우파,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며 노동자들의 임금 양보(삭감)를 요구한다.
최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KLI)은 “[임금소득] 상위 10퍼센트 임직원 임금 인상이 동결되는 경우 9만 1천5백45명의 정규직 신규채용”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이 계산은 기업이 지출하는 임금 총액은 그대로 둔 채 (소수의 임원을 포함한) 노동자 실질임금 삭감분을 월평균 2백26만 원으로 나눈 것뿐이다. 전형적인 노동자’끼리’ 고통분담론, 즉 고통전가다.
정부의 “노동개혁” 공세를 돕고자 내놓은 악의적 숫자 놀음에 불과한 것이다. 현재 KLI 원장은 박근혜 정부의 초대 고용노동부장관으로서 노동시장 구조 개악의 기초를 닦았던 방하남이다. 이 자가 정권의 “노동개혁”을 도우려고 곡학아세를 지휘하고 있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비용 절감 방식이다. 임금소득 최상위자(상위 10퍼센트)의 임금이 동결되면, 차상위자의 임금도 억제된다는 것이다. (동결된) 최상위자 수준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법은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억제가 노동계급 전체에게 하향 평준화 압력이 된다는 점을 정부와 기업주들이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국세청 자료를 분석한 소득 상위 10퍼센트의 기준 소득(세전)은 연 6천7백만 원이다.(새정치연합 윤호중) 여기에 소득 상위 10~20퍼센트 구간 노동자들의 소득(세전 소득 연 4천8백50만 원 이상)까지 억제되면 사실상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 대부분이 실질임금을 삭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연쇄 효과를 낳을 것이다.
민주노총도 이 보고서에 대해 “실제로는 상위 노동자의 임금이 동결/삭감되면, 단계적으로 하위 노동자의 임금 동결/삭감이라는 연쇄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 정규직을 공격함으로써 종국에는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옳게 비판했다.
이처럼 노동자 양보론은 오히려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뿐이다. 생각해 보자. 박근혜, 정몽구, 이건희 같은 자들이 정규직 책임론을 들먹일 때, 그들이 비정규직의 삶과 처지에 눈꼽만큼이라도 연민을 갖고 그러겠는가. 그것이 자본에게 유리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노사정 간 사회적 타협 모델을 전제로 한 노동자 양보론은 노동계급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우파의 이간질을 받아들여 노동계급의 단결을 해치기 쉽다.
노동시간 단축의 조건
한편, 같은 발표에서 KLI는 정부의 근로기준법 개악 방침(주 최대 노동시간 한도를 60시간으로 상향)과 달리 현행대로 주52시간을 한도로 해서 노동시간을 줄이면, 최대 19만 3천여 명까지 추가 고용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9월 4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기초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KLI는 노동시간 단축시 노동자 개인의 기존 임금 총액이 줄어드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KLI의 분석은 노동자 개인의 임금 총액을 깎아서 즉, 기업주들이 지불하는 임금 총액은 그대로 둔 채 노동자들끼리 임금을 나누는 효과일 수도 있는 것이다.
KLI 발표를 비판한 민주노총의 논평은 이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한 누락만은 아닌 것 같다.
10월 8일에 서울시와 〈매일노동뉴스〉가 주최한 ‘서울 일자리 대장정 노동조건 개선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늘리기가 주요한 대안으로 토론됐다.
그런데 이날 토론회에서도 노동시간 단축 논의의 가장 중요한 쟁점(‘조건’)인 기존 일자리의 임금과 노동조건이라는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박원순 시장은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에 대한 평가 요구에도 ‘중앙정부가 하는 일에 입장 표명은 곤란하다’며 답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쟁점은 가능한 피해 가려고 하는 박 시장의 스타일이겠지만, 이 쟁점에서 그런 태도는 적어도 정직한 태도라고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현행 임금체계상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자동으로 임금이 줄어드는 곳도 많고, 임금을 보전한다면 그 비용이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민주노총은 당일 토론회의 의의를 지지하고 향후 결과를 기대한다고만 하고서 ‘임금과 노동조건의 후퇴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분명히 하지 않은 논평을 발표했다.
장시간 노동
사실 노동조건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늘리기는 노동자들에게는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2013년 기준으로 한국 노동자들은 1년에 OECD 평균보다 4백 시간 더 많은 2천71시간을 일한다. 하루 8시간 기준으로 50일, 주5일제로 계산하면 1년에 두 달하고도 일주일가량을 더 일하는 셈이다. 현대자동차나 은행 노동자는 한국 평균보다도 4백 시간 더 많은 2천5백 시간을 일한다는 통계가 발표되기도 했다.(2012년)
따라서 이런 과중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주당 노동시간을 48시간으로 제한하면 일자리 1백만 개를 만들 수 있고, 현행 근로기준법의 주당 52시간 제한만 제대로 지키고 특례 업종만 없애도 일자리 62만 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민주노총,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그런데 노동시간이 줄면서 임금이 함께 줄어들면 어떻게 될까?
사실 대부분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이 낮은 기본급을 만회하는 수단이다. 무엇보다 기업주들이 시간당 임금이 낮은 점을 이용해 신규 채용보다 기존 노동자들을 더 부려먹는 방법을 선호해 왔다. 당연히 기업주들은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늘리기를 쉽게 수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기업주들과의 타협으로 임금을 양보해 노동시간을 줄인다면, 첫째, 새로 창출되는 일자리의 질은 기존 노동조건보다 더 낮은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둘째, 이미 고용된 노동자들 상당수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더 열악해질 것이다. 낮아진 임금 때문에 생산성 향상 명목으로 노동강도 강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압력도 커질 것이다.
물론 경기가 더 나빠지면 임금이 깎이더라도 노동시간을 줄여서 고용을 유지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실제로 국내외에서 그런 사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양보론으로는, 세계적 경제 위기가 해소되지 않는 지금, 계속해서 후퇴해야 하는 처지를 피하기 힘들다. 일자리의 질만 나빠지고, 해고 위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독일 폭스바겐에서도 노동조합이 1993년에 해고 대신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는 합의를 한 이후 거듭해서 임금과 노동조건 개악 등에 합의했다. 그랬는데도 2006년, 2008년의 대량해고를 막지 못했다.
대중 투쟁
이런 일은 임금과 이윤을 둘러싼 계급 간 이해관계가 화해불가능한 적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임금을 양보해서 고용을 지키자는 논리는 노동계급의 ‘지속가능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수세적 양보보다는 노동자들의 투지를 높여 기존의 노동조건을 지키려고 투쟁을 건설하면서 단결을 확대해 가는 대안이 필요하다.
따라서 조직 노동계급이 계급투쟁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경제 위기에 대응해 이윤을 보호하려고 정부와 기업주들이 “노동개혁”을 밀어붙이는 만큼, 노동계급은 파업으로 이윤 창출을 타격해야 양보를 강제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8시간 노동제를 최초로 전국적 규모에서 법제화한 1917년 러시아, 주 40시간 노동제와 긴 하계 휴가(바캉스)를 얻어 낸 1936년 프랑스와 주35시간제를 쟁취한 1998년 프랑스 등이 모두 위기 속에서도 노동계급이 강력한 투쟁으로 성과를 일궈낸 경우다. 한국도 1987년 대투쟁 다음 해에 주 44시간 노동제를 획득했다.
그런데 노동운동 내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특유의 소심함과 우유부단함 속에서 양보론과 사회적 타협론으로 기우는 것은 투쟁으로 요구를 쟁취하기 어렵다는 비관론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5월초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때처럼 대중파업 건설은커녕 노골적으로 김 빼는 구실을 하곤 한다. 앞서 든 사례들에서 민주노총이 임금과 노동조건의 후퇴 반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서 노동시간 단축 논의를 환영한 것이 우려스러운 이유다.
선진 노동자들은, 국제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에서 배워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을 단호하고 일관되게 옹호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변혁적 정치와 만나는 것이다.